주위상책 走爲上策 때로는 작전상 후퇴도 필요하다
志取之三十六計(36) - 走為上計
주위상(走爲上)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
走 달릴 주
爲 할 위
上 위 상
’도망가는 것을 상책으로 삼는다.’
이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다.’는 말을 낳은 마지막 계략이다. 병법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일부러 후퇴하는 것도 불사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 또한 병법의 철칙이다. <손자>에도 ’병력이 열세이면 물러나고,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고 쓰여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승리도 패배도 없는 것이다. 불리할 때 일단 퇴각하면 전력을 보완하여 다시 싸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용기있게 후퇴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용기를 지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第三十六計 走為上計
全師避敵,在次無咎,未失常也。
譯:全軍退卻,甩開敵人,以退為進,
待機破敗,這是不違背正常的法則的。
If all else fails, retreat
(走為上策/走为上策, Zǒu wéi shàng ce)
cf. 退避三舍
If it becomes obvious that your current course of action will lead to defeat, then retreat and regroup. When your side is losing, there are only three choices remaining: surrender, compromise, or escape. Surrender is complete defeat, compromise is half defeat, but escape is not defeat. As long as you are not defeated, you still have a chance. This is the most famous of the stratagems, immortalized in the form of a Chinese idiom: "Of the Thirty-Six Stratagems, fleeing is best" (三十六计,走为上计).
(패전계 -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라)
36계 주위상(走爲上) - 일단 달아났다가 후일을 도모하라
走爲上 全師避敵. 左次無咎, 未失常也.
막강한 적을 만났을 때 곧바로 달아나는 것을 최상의 방안으로 간주하는 계책이다. 전군이 강적을 피하는 것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해당한다. 용병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군사가 일시 왼쪽으로 물러나 포진하는 것은 허물이 없으니, 결코 병법의 기본 이치를 잃은 것이 아니다”라는 뜻을 지닌 〈사괘〉의 ‘좌차무구(左次無咎), 미실상야(未失常也)’ 효사와 취지를 같이한다.
[해설]
주위상의 ‘주’를 두고 적잖은 사람들이 이를 달아날 도(逃)와 같은 뜻으로 새기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상황에서 실력을 보전하기 위해 취하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뜻이다. ‘전술적 퇴각’을 의미한다. 투지와 기개에 하등 변함이 없다. 오히려 투지를 더욱 불태우는 방안으로 활용할 수 있다. 도(逃)는 사기가 땅에 떨어진 나머지 황급히 달아나는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는 《회남자》 〈병략훈〉에 나오는 ‘실즉투(實則鬪), 허즉주(虛則走)’와 취지를 같이한다. 여기의 ‘실’은 병력이 충실한 경우를 뜻하고, ‘허’는 병력이 피폐해진 상황을 의미한다. 아군이 허의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무모하게 실의 상황에 있는 적과 정면대결을 펼칠 수는 없는 일이다. 〈병략훈〉의 이 구절은 일시 적과의 충돌을 피해 힘을 보충한 뒤 다시 생각해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똑같이 ‘퇴각’의 뜻을 지니고 있음에도 굳이 도(逃)가 아닌 주(走)를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사피적(全師避敵)의 ‘전사’는 전군(全軍)의 의미다. 병서에는 통상 3군으로 나온다. 좌차무구(左次無咎)의 ‘차’는 사흘 이상 머물거나 장기 주둔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전》 〈노장공 3년〉조에 “무릇 군사가 출동해 하루 동안 머무는 것을 사(舍), 이틀 동안 머무는 것을 신(信), 그 이상 머무는 것을 차(次)라고 한다”고 했다. 주위상 계책은 대적이 불가능한 강적을 만났을 때 정면충돌을 피하고 속히 피해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말할 것도 없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주위상이라는 표현은 《남제서》 〈왕경칙전〉에서 나온 것이다. 주위상의 계책을 구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기(戰機)를 모색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심기일전의 취지와 같다.
무릇 사세(事勢)가 여의치 못해 일시 퇴각할지라도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탄식하며 오강에서 자진한 항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항우에게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권한 어부의 말처럼 일시 몸을 숨기고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다. 월왕 구천은 와신상담 끝에 마침내 자신에게 한없는 굴욕을 안긴 오왕 부차를 제압하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운 기간일 수 있으나 한때 실패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하리라는 법은 없다. 훗날을 기약하며 인내하고 실력을 닦는 것이 정답이다.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투지가 관건이다.
마침내 바라던 바를 성취했을 경우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역시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인 주위상 계책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도덕경》 제9장에 나오는 공성신퇴(功遂身退)가 정답이다. 《도덕경》의 해당 대목이다.
“쥐고 있으면서도 더 채우려 하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담금질을 통해 이미 날카로워졌는데도 더 날카롭게 만들려 하면 오히려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옥(金玉)이 방 안에 가득 차면 지켜낼 수 없고, 부귀하여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을 이루어 명성을 떨치게 되면 이내 뒤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이치에 부합한다.”
항간에서는 공수신퇴보다 공성신퇴(功成身退)를 더 많이 쓴다. 같은 뜻이다. 공성신퇴를 행한 대표적인 인물로, 후한 초기 광무제 유수(劉秀) 때 재상을 지낸 이통(李通)을 들 수 있다. 지방호족 출신이다. 당시 지방호족은 일종의 영주나 다름없었다. 지방의 실력자인 동시에 중앙정부 요직에 관료를 배출하는 당사자이기도 했다. 대지주인 호족의 세력이 커질수록 소지주였던 농민은 어느새 토지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유적단(流賊團)을 만들었다. 호족은 유적단의 습격을 막기 위해 담을 높이는 것만으로 부족해 사병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를 부곡(部曲)이라 했다. 부곡은 양민이 아니다. 일종의 노비나 다름없는 비자유민을 말한다. 빚이나 돈을 갚지 못해 부곡민이 된 경우가 흔했다. 식객으로 있다가 그에 상당하는 노동을 제공한 경우도 있었다. 당나라 때 들어와 부곡은 노비보다 신분이 높기는 했으나 자유가 없는 사람을 뜻했다.
유적이 지방호족을 습격하면 부곡은 막아야 했으나 따지고 보면 부곡이나 유적이나 그 신세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호족은 체질적으로 우파인 것이 맞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나라 때 들어와 이들 모두 반체제파인 좌파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탓이었다.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왕망이다. 그는 신나라를 세우자마자 모든 것을 주나라시대로 돌리고자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무혈혁명으로 신나라를 세웠음에도 스스로 화를 자초한 배경이다.
당초 광무제의 조상인 장사왕 유발(劉發)의 모친 당희(唐姬)는 본래 정희(程姬)의 시녀였다. 노왕(魯王) 유여(劉餘), 강도왕 유비(劉非), 교서왕 유단(劉端) 등을 낳으면서 한경제의 총애를 받게 된 정희는 한경제가 찾아왔을 때 달거리가 있어 시녀인 당희를 대역으로 내놓았다. 그래서 태어난 이가 장사왕 유발이다. 한무제를 제외한 13명의 황자가 제후왕이 되었다. 유발의 장사국은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유발이 죽자 그의 아들 유용(劉庸)이 왕위를 잇고, 나머지 5명의 아들은 열후가 되었다. 5명 가운데 유매(劉買)는 용릉후(舂陵侯)에 봉해졌다.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远县) 백가평진(柏家坪镇)인 용 땅은 비습해 살기가 좋지 않았다. 그의 손자 유인(劉仁)은 민호가 줄어들어도 좋으니 북쪽으로 옮겨가게 해달라고 탄원해 결국 남양군의 백수향(白水鄕)으로 전봉(轉封)되었다. 전봉된 후에도 계속 용릉후로 불렸다. 유인의 아들 유창(劉敞)의 시대는 전한 말기에 해당한다.
유창의 사촌인 유자장(劉子張)의 아들에 유현(劉玄)이 있었다. 협객 노릇을 좋아한 그는 법을 어겨 평림(平林) 땅으로 피난했다. 공교롭게도 유적단의 일종인 녹림군(綠林軍)이 유행병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사상 처음으로 유적단과 호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당시 평림에는 진목(陳牧)과 요담(廖湛) 등이 이끄는 별도의 유적단이 있었다. 이들을 평림병(平林兵)이라고 한다. 이들이 녹림군에서 갈라져 나온 왕광(王匡)의 무리와 연합했다. 왕광이 신시(新市) 출신이었던 까닭에 이들을 신시병(新市兵)이라 했다. 평림병과 신시병이 합쳐지자 이를 통솔할 우두머리가 필요했다. 한조 부흥을 바라는 소리가 높았으므로 남양 유씨의 인물이 간판으로 적당했다. 이때 선택된 것이 유현이다. 그가 바로 광무제 유수에 앞서 황제를 칭한 갱시제(更始帝)이다.
남양 유씨의 종주(宗主)인 용릉강후(舂陵㝩侯) 유창(劉敞)의 입장에서 볼 때 유현은 5촌, 유수는 조부 형제 계통인 7촌에 해당했다. 남양 유씨를 비롯해 지방 호족 내에서는 유현보다 유수 형제의 인기가 높았다. 근방의 여러 호족과 널리 인척관계를 맺은 결과다. 유수의 형 유연(劉縯)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이들 형제의 모친은 호양(湖陽)의 대호족인 번중(樊重)의 딸이다. 번씨는 재산가였다. 유수의 누이 가운데 한 사람은 신야현의 등신(鄧晨)에게 시집갔고, 또 한 누이는 하남성 완현(宛縣)의 선비 이통(李通)의 아내가 되었다. 숙모의 집안은 신야현의 내씨(來氏)로 전한 때 많은 문무고관을 배출한 집이다. 이 호족들의 가계도는 다음의 표와 같다.
[광무제와 갱시제의 가계도]
원래 이통은 무예에 정통하고 병서를 숙독한 까닭에 왕망의 신임을 얻어 왕위장군으로 있었다. 그는 왕망의 천하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이내 병을 칭하고 물러났다. 왕망은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이통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낙향한 그는 사람이 충직해 재산이 별로 없었다. 생계를 위해 고향에서 곡식을 팔았다. 하루는 유수가 곡식을 사러 갔다가 이통을 알게 되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이내 의기를 투합했다.
훗날 유수는 거병하면서 이통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통은 왕망의 지은(知恩)을 입은 까닭에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유수가 여러 차례 청하자 마침내 동의하고 나섰다. 유수는 이통의 도움을 받은 이후 그 세력이 날로 커졌다. 이통 역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했지만 시종 정성을 다해 보필했다. 유수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이통의 일족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수는 이통의 여동생을 출가시킨 데 이어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이통을 재상으로 삼았다.
당초 갱시제 유현 휘하에 탁무(卓茂)라는 책사가 있었다. 지모가 출중했다. 그는 유수가 하북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자 유현에게 속히 유수를 제거할 것을 권했다. 유현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내 그 곁을 떠나면서 이같이 탄식했다.
“유수가 천하를 얻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수는 백방으로 탁무를 찾아내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하루는 탁무가 유수에게 말했다.
“왕망은 재상이 된 후 간계로 민심을 수습한 뒤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을 주살하고 마침내 보위를 찬탈했습니다. 재상의 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유수는 후한을 세운 후 탁무의 충언을 잊지 않았다. 이통을 재상으로 삼은 후에도 매우 신임하기는 했으나 정작 중요한 일은 그와 상의하지 않았다. 이통은 처음에는 배신감을 느꼈으나 이내 유수가 제2의 왕망이 나올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최대한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부인과 낙향문제를 논의하자 부인이 크게 화를 내며 은밀히 오빠를 찾아갔다.
“황상은 너무 인정이 없습니다. 이통 일족은 황상을 위해 생사고락을 같이했는데도 왜 관직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것입니까?”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유수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물러나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수가 곧 이통을 불렀다.
“공은 짐과 생사를 같이하며 공을 세웠소. 짐이 어찌 경을 떠나보낼 수 있겠소?”
이통이 말했다.
“폐하, 신도 폐하를 계속 보필하고 싶으나 여러 해 동안 전장을 전전한 탓에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러하나 몸이 따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수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면 병이 나은 후 계속 짐을 도와주도록 하시오!”
유수의 속마음을 읽은 이통은 이때부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재상의 자리는 유지했지만 실권이 없었다. 이통은 친구들과 바둑을 두고 담소하며 한가롭게 지냈다. 유수도 크게 기뻐했다. 결국 이통은 재상의 인수를 반납하고 낙향했다. 유수는 이통의 아들을 후작으로 봉하면서 그의 공을 기렸다. 그가 천수를 누린 것은 바로 《도덕경》에서 역설한 공성신퇴를 실천했던 덕분이다.
제 36 계 주위상(走爲上)
이 계는, 원래 사정이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까지 발전해 다른 좋은 대책이 없을 때는 그저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 뜻이 변화되어, 적과 아군의 역량이 너무나 큰 차이로 불리할 때,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후퇴하여 강적을 피하고, 이후 새로운 전기(戰機)를 모색하기 위해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력을 보존하여 나중에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계책이다.
*全師避敵 (전사피적)
“36계 중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다.” 어떤 분야를 불문하고 전진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후퇴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후퇴를 잘 해야 만이 더 훌륭하게 자기를 보전할 수 있다.
원 문
全師避敵. 左次無咎, 未失常也. (전사피적. 좌차무구, 미실상야.)
번 역
전군이 퇴각하여 강적을 피하는 것은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적을 다시 쳐 부수기위한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용병 법칙에 전혀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역자 주: 左次無咎, 未失常也는 <주역: 사(師)> 괘에서 나왔다. 즉, 군대가 왼쪽에 진을 칠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에 칠 것인가 하는 것은 지리 환경과 피아간의 형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왼 쪽에 진을 치는 것이 잘못이 없다는 것은 행군과 전투의 일반 원칙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 설
이 계는 <남제서: 왕경칙전(南齊書: 王敬則傳)>: “단공(檀公) 36 책 중에서, 달아나는 것이 상책(走是上計)이라 했으니, 부자(父子)는 다만 급히 달아나야 할 뿐입니다.”에서 나왔다.
이 계는, 원래 사정이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까지 발전해 다른 좋은 대책이 없을 때는 그저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 뜻이 변화되어, 적과 아군의 역량이 너무나 큰 차이로 불리할 때,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후퇴하여 강적을 피하고, 이후 새로운 전기(戰機)를 모색하기 위해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력을 보존하여 나중에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계책이다.
생활에서의 활용
<36계>와 군사-진(晉) 문공(文公), 삼사(三舍)를 물러 나다
군사상에 있어서 이 계는,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해서 아군이 도저히 승산이 없을 때, 주도적으로 퇴각하여 실력을 보전하고자 하는 계책이다. 군사상에 있어서 아군이 완전한 열세에 처했을 때는 “달아나는 것(走)”이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말하는 “달아나는 것(走)”은 상황에 닥쳐서 피동적으로 패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계획을 세워서 주도적으로 퇴각하는 것이다. 그냥 도망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이며 다시 좋은 기회를 노리거나 새로운 기회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춘추(春秋) 초기, 초(楚)나라는 날로 강성해져 초나라 장군 자옥(子玉)이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네 개 소국들을 위협해 같이 출병해서 초군의 작전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진 문공은 초나라에 기울은 조(曹)나라를 막 공격했던 터라 진초(晉楚) 두 나라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옥은 부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진나라를 향해 떠났고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형세를 분석하였다. 그가 보았을 때 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는 매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초군은 강하고 진군은 약했으며, 또한 초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으므로 그는 잠시 후퇴하여 초군의 예봉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외적으로는, “당시 내가 쫒겨서 도망다닐 때, 초나라의 선왕이 예를 다하여 나를 대해 주었다. 나는 그때 장래 진나라로 돌아 가게 되면 양국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자고 그와 약속하였다. 그리고 만부득이 양국이 교전하게 되면 나는 먼저 삼사(당시 1 사는 30 리 였다)를 물러 나겠다고 약조하였다. 오늘, 자옥이 나를 치러 오니, 나는 약속한대로 먼저 삼사를 물러 나겠다.”라고 짐짓 말하였다.
진 문공은 군을 이끌고 90 리를 후퇴해, 진 나라 국경 지역인 성복(城濮)에 이르렀다. 성복은 황하(黃河)에 임해 있고, 태행산(太行山)을 끼고 있어 적을 막아 내기에 적합했다. 거기에다가, 진 문공은 이미 진(秦)나라와 제(齊)나라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 두었다.
자옥이 부대를 이끌고 성복까지 추격해 와 보니, 진 문공은 이미 진을 굳게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 문공은 초나라의 좌, 중, 우의 삼군을 분석해 보니 우군이 가장 취약하였는데, 우군의 전위 부대는 진(陳)과 채(蔡)의 병사들로써, 그들은 본래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따라 나선 것이라 투지가 없었다. 자옥은 좌우군으로 먼저 진격하게 하고 중군이 뒤를 따르게 했다. 초나라 우군이 진(晉)나라 군대를 향해 돌진하자 진(晉)군은 갑자기 또 후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진(陳), 채(蔡)의 지휘관들은 진(晉)군이 겁을 먹고 또 도망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바짝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뜻밖에, 진(晉)군 중에서 갑자기 한 부대가 달려 나오는데, 전차를 끄는 말이 모두 호랑이 가죽을 덮어 쓰고 있었다. 진(陳), 채(蔡)의 전마들은 이것들이 진짜 호랑이라고 여긴 나머지, 무서워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머리를 돌려 달아 나 기병들이 말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초나라 우군의 대패였다. 진 문공은 병사들을 진(陳), 채(蔡) 군사의 옷을 입혀서 보내 자옥에게 승전을 보고하도록 했다: “우군이 이미 승리했습니다. 원수께서 어서 진격하십시오.” 자옥이 전차에 올라 바라 보니 진(晉)군 후방에 먼지가 크게 일고 있었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진(晉)군이 일격도 견디지 못하는구만.”라고 말했다. 실지로는 그것은 진(晉)군이 적을 유인하기 위한 계책이었으니, 말의 꼬리에다 나무 가지를 묶고 왔다 갔다 하게 해, 일부러 먼지가 하늘을 가리도록 꾸몄던 것이었다. 자옥은 좌군에게 힘을 합쳐 전진하도록 급명을 내렸다. 진(晉)군은 일부러 대장기를 펼쳐 들고는 뒤로 퇴각하자 초의 좌군도 다시 진(晉)군의 복병 함정에 걸려 들게 되어 대패하고 말았다. 자옥의 중군이 도착하자 진(晉)군은 삼군이 합력하여 자옥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때서야 자옥은 우군, 좌군이 모두 섬멸되었으며 자기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그 자신은 맹장 성대심(成大心)의 호위로 목숨은 건졌지만 부대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그저 화를 삼킨체 돌아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진초(晉楚) 전쟁 중 진 문공이 취한 여러 번의 퇴각은 모두 피동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퇴각이었으며 새로운 전투 기회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달아나는 것(走)”이 좋은 계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6계>와 비즈니스-제의명(堤義明), 잘 나갈 때 결단성있게 한 발 물러서다
기업 경영자는 여러 가지 정황에서 물러나야(走) 할 때가 많다: 대외 투자 시 정책에 변화가 있어 상황이 크게 불리해 지면 최대한 자본을 회수해 “물러나야(走)”한다; 시장 전망이 어둡고, 투자는 많고 이윤은 적거나 심지어 손해를 보는 제품은 정리하고 제품의 구성을 재조정해야 한다; 단기투자에 적합한 프로젝트는 기한이 되면, “그만 두어야(走)” 한다; 시장을 개발하기 어렵고 소요비용을 기업이 부담할 수 없으면 “손을 떼어야(走)”한다.
현대 비즈니스 경쟁에서 줄곧 공격만 해서는 안 되고, 필요할 때에는 물러서는 방법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일본 상인 제의명은 이 도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1965 년, 일본의 땅값이 한창 올라 가고 있을 때, 여태까지 부동산 구매를 위주로 하던 서무(西武) 그룹이 돌연 구매를 중지하게 되자 여러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의 이 조처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부가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가는 것을 방임하지 않고 반드시 억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시적 이익만 탐하다가는 나중에 훨씬 큰 대가를 치룰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은 이후의 사실이 증명해 주었다.
당시, 많은 대기업들이 땅값이 끊임없이 치솟을 것이라 보고 속속 전장에 뛰어 들었고, 심지어 많은 중소기업들도 이 열차를 놓질까 두려워 달려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모두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 져, 일부는 도산하고 일부는 무거운 부담으로 운신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36계>와 처세-이통(李通)의 명철보신(明哲保身)
이 계가 처세 방면에 쓰일 때는 바로 노자(老子)가 말한 바: “가득 찬 부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그만 둠만 못하고; 칼을 갈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하기 어려우며;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해도 지키기 어렵고; 부귀하다고 교만하면 그 허물이 자기에게 돌아 온다. 성공하여 이름을 날리면 몸은 오히려 물러 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常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遣其咎. 功成名遂身退, 天之道. 지이영지, 불여기이; 췌이예지, 불가상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견기구. 공성명수신퇴, 천지도. 역자 주: 노자 제 9 장이다.).”사람이 처세를 하는데 마음이 활달하고, 적절한 때에 물러 날 줄 알며, 버릴 줄 아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다.
유수(劉秀)가 제위에 올랐을 때, 재상은 이통(李通)이었다. 이통은 그의 매부이기도 하고 또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형제 같은 사이였다.
漢 光武帝 劉秀
이통은 하남(河南) 완현(宛縣) 사람으로, 무예에 정통하고 병서를 숙독하였으므로 당시 왕망(王莽)의 신임을 얻어 왕위장군이라 불리었다.
(역자 주: 왕망은 BC 45~AD 23 년 사이의 사람. 서한 西漢 말년의 외척으로 제위를 찬탈하여 신 新 나라를 세웠다.) 이통은 아주 원대한 식견을 가졌던 사람이었기에, 왕망의 제도 개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왕망의 천하가 반드시 멸망하게 될 줄 알고는 병을 칭하고는 물러 났다.
왕망은 그를 아까워하여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이통은 이미 확고히 결심했기에 의연히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이통의 위인이 충성스러웠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돈이 별로 없었다. 생계를 위해 그는 고향에서 곡식을 팔았다.
어느 날 유수가 곡식을 사러 갔다가 이통과 서로 알게 되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의기가 투합했다. 유수는 이통이 문무를 겸비하고 관리로서 청렴한 것을 보고 장래 반드시 대장수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이통도 또한 유수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가 보기에 유수는 능수능란하여 환경에 잘 적응하고 도량이 넓으며, 품은 뜻이 웅대하여 장래 반드시 큰 일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보았다. 이래서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였는데 때로는 밤을 새워 천하 영웅호걸을 논하고 천하 치국의 도리를 나누었다.
훗 날, 유수가 왕망 타도의 기치로 일어 섰을 때, 그는 이통에게 고향을 떠나 자기를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처음에는 이통이 따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건 왕망이 그에게 섭섭지 않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유수가 여러 차례 청하자 이통은 마침내 동의하고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수는 이통의 도움을 받아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하게 되었다. 이통 역시 유수를 따라, 동서남북의 온갖 전쟁터를 다니면서 무수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종 동요되지 않고 그를 도왔다. 유수가 일어 선 이래 그가 천하를 통일하기 까지 이통의 가족은 모두 64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이통은 실로 개국공신이었다.
유수는 이통의 위인이 충성스럽고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기에, 그의 여동생을 그에게 출가시켰고, 동한(東漢) 건국 이후에는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당시 유현(劉玄) 수하에 탁무(卓茂)라고 하는 책사가 있었는데 지모가 아주 뛰어 났다. 그는 유수가 하북(河北)에서 병력을 모으고 말을 사 들이고, 군량을 비축하는 것을 보고, 바로 유현에게 유수를 죽이도록 권유했었다. 유현이 말을 받아 들이지 않자, 탁무는 실망해서 유현을 떠났는데 떠나기 전, “유수가 천하를 얻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수는 탁무라고 하는 자가 유현에게 자기를 죽이도록 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탁무가 원대한 식견을 갖추었다고 생각해 사방으로 그를 찾아 나서 마침내 그를 찾아 내었다. 그는 탁무에 대해 아무런 원한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매우 존경하였다. 탁무 역시 크게 감동을 받아 후일 유수의 책사가 되었다.
유수는 탁무의 말을 매우 신임하였다.
어느 날 탁무가 유수에게 말했다: “왕망은 재상이 된 후, 인심을 매수하고 심복들을 모아 한 발 한 발 조정으로 깊게 들어 갔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주살하고 자기의 수하들을 조정에 포진시켰습니다. 마침내 왕망은 대권을 손에 잡게 되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를 찬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상의 자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후일, 유수가 동한을 세운 후, 탁무가 한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재상의 자리가 매우 중요한 만큼 절대 가볍게 생각하고 재상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자기의 천자 자리가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통이 재상이 된 후, 유수는 그를 매우 신임하기는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이통과 상의하지 않았다. 이통은 처음에는 유수가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었으나 훗 날 다시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천자는 재상에 의해 껍데기만 남는 신세가 되어, 이름만 있고 아무런 실권이 없게 될 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즉, 제 2 의 왕망이 나와 황권을 찬탈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통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유수의 마음을 알게 된 후부터, 이리 저리 피하며 최대한 조정 일에 덜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요직에 있던 대신들이 황제의 불신임을 받고 목숨을 잃었던가. 나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을 때 용퇴하여 명철보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통은 부인과 의논해서 자리에서 물러 나 고향으로 돌아 가고자 했다. 이통의 부인은 그 말을 듣자 마자, 오빠 유수가 이통을 괴롭게 한 것으로 여기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녀는 여러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이통의 부인은 오빠를 만나 따지러 간 것이었다. 그녀는 오빠를 보자 화를 내며 따졌다: “황상 오빠, 오빠는 너무 인정이 없습니다. 이통 일가는 오빠를 위해 생사를 함께하였는데도, 공로는 없고 고생만 시키는군요. 오빠는 왜 그 사람을 관직에서 물러 나라고 압력을 넣습니까?”
유수는 영문을 모른 채,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여동생을 무척 귀여워하였기에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 “얘야,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재상에게 물러 나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통의 부인은 오빠와 다시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후 바로 집으로 돌아 갔다.
유수는 이통이 사직하려는 것을 알고는 바로 그를 불러 애기했다: “경은 짐을 따라 생사의 위험을 같이 했던 사이로 고생을 많이 하고 공로가 큰 사람으로써, 짐이 어찌 경을 떠나 보낼 수 있단 말이오?”
이통이 대답했다: “폐하, 신도 폐하를 계속해서 보좌하고 싶습니다만, 여러 해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니 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 마음은 있사오나 그 체력이 뛰 따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수는 이에 대해, “오늘 병이 있으면, 병이 낳은 후 계속해서 짐을 도와 주기 바라오.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을 편히 하고 휴양하기 바라오.”라고 일렀다.
이통은 이 때부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 가지 않았다. 재상의 자리는 아직 이통의 것이었지만, 권력은 없었다. 이통은 즐겁고 한가롭게 지냈다. 매일 부인과 기분 전환으로 놀고 즐길 수 있었고, 시간이 남으면 친구와 바둑을 두고 담소를 즐겼다. 유수도 매우 기뻐했다. 재상이 가급적 정사에 적게 참여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바 였기 때문이었다.
훗 날, 이통은 재상의 인수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유수는 이통 일생의 공적이 뚸어 났다고 여겨 그의 아들을 후작으로 봉했다. 이통이 세상을 떠나자, 유수는 친히 조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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