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육계苦肉計 나를 희생해서 적을 안심시키다
고육지책 苦肉之策
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킨다
제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계책을 말하며
고육지계(苦肉知計)라고도 한다.
苦 : 괴로울 고
肉 : 고기 육
之 : 의 지
策 : 꾀 책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형주(荊州)의 유비(劉備)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赤壁戰鬪)가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을 목전에 둔 연합군의 총사령관 주유(周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의 진영에는 채중(蔡中)·채화(蔡和) 형제가 있었다. 조조가 주유의 계략에 빠져 그들의 형 채모(蔡瑁)를 참살하고 크게 후회한 나머지 두 사람을 달래 거짓으로 항복시켜 오나라로 밀파한 자들이었다. 물론 주유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역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척 하고 있었다. 자신이 거짓 정보를 조조의 군중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의 계략인 셈이다.
주유의 심복인 황개(黃蓋)가 찾아와 화공(火攻)을 건의했다. 사실 주유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중에는 조조의 첩자 채씨 형제가 있어 노련한 주유가 화공 같은 중요한 작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먼저 거짓으로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생각해냈다. 문제는 그것을 행동에 옮길 사람이었다. 그러자 황개가 선뜻 자청(自請)하고 나섰다. 이 일은 살갗이 터지는 고통없이는 할 수 없는, 이른바 고육계(苦肉計)다. 황개는 그것마저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은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 그것은 황개로 하여금 거짓 항복을 건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전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때 황개가 “누가 보아도 조조를 꺾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항복하느니만…….” 하고 말했다. 그 때 주유의 벽력(霹靂) 같은 질책(叱責)이 떨어졌다. 물론 각본이었다. 즉시 황개는 끌려나와 형틀에 묶였다. 곧이어 곤장 소리와 함께 비명(悲鳴)소리가 들려왔다. 백여 대를 맞은 황개의 엉덩이는 허물어졌다. 그 동안 황개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그날 밤 만신창이가 된 황개에게 심복인 감택이 와서 걱정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황개가 사실을 말하자 감택은 혀를 찼다.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계책이었던 것이다. 황개는 감택을 시켜 조조에게 투항서(投降書)를 작성해 밀사를 통해 조조에게 전달했다. 물론 황개가 곤장을 맞았다는 사실은 채씨 형제에 의해 조조의 진영(陣營)에 벌써 알려져 있었다. 밀사를 만난 조조는, “흥! 이것은 고육책이다.” 하며 믿지 않았으나, 직접 현장을 목격한 간첩 채씨 형제의 보고와 다방면에 걸쳐 접수된 간첩들의 정보가 일치한다는 것을 듣고 황개의 투항선(投降船)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 밤, 황개는 기름을 잔뜩 실은 투항선단을 이끌고 조조의 대선단앞에 나타나 빠른 속도로 거대한 전투함의 선단을 들이박고 기름에 불을 붙여 조조의 대함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황개의 투항선 앞에는 대못을 박아놓았으므로 부딪치기만 하면 못이 박혀 꼼짝달싹 못하고 같이 불에 타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노려 연합군의 수군들이 총공격하여 조조의 군사를 닥치는 대로 살륙하여 적벽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었다. 위와 같은 고육책은 간첩을 이용하여 역정보를 흘린 계책이었으므로 소위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라고 한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파주(巴州)와 촉주(蜀州)를 얻었으며 촉왕조(蜀王朝)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
’자기 몸을 상처내는 책략.’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 대전은 너무도 유명하다. 조조와 주유의 맞대결에서 승패를 가름한 것은 황개(黃蓋)의 전략이었다. 황개는 주유와 사이가 나쁜 것처럼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리고는 조조에게 몰래 밀서를 보내 귀순할 의사를 전한 다음 배를 접근시켜 화공(火攻)을 가했다. 이로 인해 조조의 군사는 큰 혼란에 빠졌고 조조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갔다. 여기서 황개가 조조를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자기 몸을 상처내는 책략이 바로 ’고육계’이다. 이와 같은 책략은 옛날부터 전쟁 중에 사용된 적이 많았다. 그중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총애하는 신하를 희생시킨 예도 가끔 있을 만큼 승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第三十四計 苦肉計
人不自害,受害必真。假真真假,間以得行。童蒙之吉,順以巽也。
譯:人不自己迫害自己,受迫害必然是真的;
真的變假,間諜便乘機活動。
《易經•蒙》卦說:把他騙得乖乖的,順著他活動。
Inflict injury on oneself to win the enemy's trust
(苦肉計/苦肉计, Kǔ ròu jì)
Pretending to be injured has two possible applications. In the first, the enemy is lulled into relaxing his guard since he no longer considers you to be an immediate threat. The second is a way of ingratiating yourself to your enemy by pretending the injury was caused by a mutual enemy.
(패전계 -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라)
34계 고육계(苦肉計) - 자해 수단을 써 심장부로 침투하라
苦肉計
人不自害, 受害必眞. 假眞眞假, 間以得行. 童蒙之吉, 順以巽也.
적의 신임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해치는 계책이다. 통상 사람들은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다. 해를 입었을 경우 상대방이 의심하지 않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아군이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거짓을 진실로 믿게 하면 이미 이간계(離間計)는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유치하고 몽매한 동몽(童蒙)이 길한 것은 유순하고 복종하기 때문이다”라는 뜻을 지닌 〈몽괘〉의 ‘동몽지길(童蒙之吉), 순이손야(順以巽也)’ 효사와 취지를 같이한다.
[해설]
가진진가(假眞眞假)는 진짜를 가짜로 가장하고, 가짜를 진짜로 가장한다는 뜻이다. 앞에 나온 ‘가’는 동사, 뒤에 나온 ‘가’는 명사다. 정반대로 앞에 나온 ‘진’은 명사, 뒤에 나온 ‘진’은 동사로 사용되었다. 간이득행(間以得行)의 ‘간’은 적의 내부를 분열시키는 이간(離間)을 말한다. 반간과 같은 뜻이다. 병법에서 말하는 반간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적의 첩자를 잡아 역이용하는 계책을 말하나 일상적으로는 사람이나 국가 사이를 헐뜯어 서로 멀어지게 만드는 ‘이간’의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의 ‘행’은 생각하거나 계획한 대로 일을 해냈다는 수행(遂行)의 의미다. 간이득행은 곧 이간계가 주효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몽괘〉의 ‘동몽지길(童蒙之吉), 순이손야(順以巽也)’ 괘사는 무지한 어린애를 순순히 따르도록 만든다는 취지다. 순손(順巽)은 순하고 공손하다는 뜻이다. ‘손’은 공손할 손(遜)과 통한다. 고육계는 일정부분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관건이다. 적을 철저히 속이기 위해서다.
고육계는 《삼국연의》 제46회 헌밀계황개수형(獻密計黃蓋受刑)에서 나왔다. 《삼국지》와 《자치통감》에는 거짓으로 투항하는 계책인 사항계(詐降計)만 나올 뿐 고육계는 나오지 않는다. 나관중이 새롭게 만들어낸 계책에 해당한다. 고육계는 사항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계책에 속한다. 크게 보면 사항계와 고육계는 물론 사마의가 조상을 일거에 제거할 때 사용한 사병계(詐病計) 모두 이간계의 일환에 속한다. 적의 수뇌부를 이간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항계든 고육계든 모든 종류의 이간계는 기본적으로 적을 그럴듯하게 속여야 주효할 수 있다. 어설픈 연기는 오히려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 있다. 고육계의 경우는 자신을 상하게 만든 데서 출발하고 있는 만큼 스스로 해치는 자해(自害)든 타인에 의해 상처를 꾸미는 타해(他害)든 완벽한 연출이 필요하다. 이간계 역시 반간계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지략싸움에 해당하는 까닭에 이간계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뛰어난 참모의 도움이 절실하다. 당대 최고의 책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자문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역사상 고육계를 최초로 구사한 사람은 춘추시대 말기의 자객 요리(要離)다. 《오월춘추》에 따르면 기원전 512년 오나라 공자 광(光)은 오자서가 소개해준 자객 전제(鱄諸)의 도움으로 사촌동생인 오왕 요(僚)를 제거한 뒤 보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아들 부차(夫差)와 더불어 춘추시대 말기에 오나라의 패업을 이룬 합려(闔閭)다. 그는 오왕 요의 아들인 경기(慶忌)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경기가 제후들과 연합해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513년 오왕 합려가 오자서에게 물었다.
“전에 전제의 일만 하더라도 그대의 나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깊은 바가 있소. 지금 듣기로는 경기가 제후들과 계책을 꾸민다 하오. 이에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자리에 누워도 편치 않은 상황이오. 어찌해야 하오?”
오자서가 대답했다.
“비록 몸이 왜소하기는 합니다만 그와 한번 계책을 꾸며보십시오.”
합려가 물었다.
“내가 우려하는 적수는 1만 명을 상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자요. 어찌 그런 자와 대사를 도모할 수 있겠소?”
“그는 계책이 뛰어납니다. 1만 명을 상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자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요?”
“성은 요(要), 이름은 리(離)입니다. 저는 일찍이 그가 천하장사로 알려진 초구흔(楚丘訢)을 모욕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한가한 틈을 내어 그를 꼭 대접하고 싶소.”
오자서가 요리를 만나 합려의 말을 전했다.
“오왕이 그대의 높은 의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오.”
요리가 오자서와 함께 찾아가자 합려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저는 도성에서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으로 몸이 수척하고 작은데다 힘이 없습니다. 바람 앞에 서게 되면 곧 뒤로 쓰러지고, 바람을 등에 지게 되면 앞으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만일 대왕의 명이 있게 되면 제가 어찌 모든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합려는 내심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리가 이내 이같이 장담했다.
“대왕은 경기를 근심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를 제거토록 하겠습니다.”
합려가 말했다.
“경기의 용력은 사람들이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바요. 체구가 건장해 1만 명의 사람도 감히 당해낼 수 없소. 그는 달아나는 들짐승을 가히 추격할 수 있고, 손으로 날아가는 새를 낚아챌 수도 있소. 몸을 한번 도약시켜 무릎을 오므렸다 펴면 한 걸음에 수백 리를 뛰어가오. 나는 일찍이 그를 뒤쫓아 강변까지 갔던 적이 있소.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로 날듯이 내달렸으나 그에 미치지 못했소. 몰래 활을 쏘았지만 그는 화살을 맞고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소. 지금 그대의 역량은 도무지 그를 따를 수가 없소.”
“대왕이 저를 써주시기만 하면 능히 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듣건대 ‘처자식과의 즐거움에 빠져 성의를 다해 군주를 섬기지 못하는 것은 불충이고, 집안에 연연하여 군주의 우환을 제거치 못하는 것은 불의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짐짓 죄를 지어 망명할 터이니 저의 처자식을 모두 죽여 거리에서 불태운 뒤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시기 바랍니다. 이어 1,000금의 상금을 사방 100리의 성읍에 내걸어 저를 잡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경기가 틀림없이 저를 믿을 것입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소.”
요리가 곧 죄를 얻은 것처럼 가장해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합려가 그의 처자식을 거리에서 불태운 뒤 시신을 거리에 내걸었다. 요리가 제후들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하자 모두 그의 말을 믿었다. 마침내 위(衛)나라로 가 경기를 만났다.
“합려가 무도한 것은 공자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저의 처자식을 모두 참수한 것도 모자라 불에 태워 거리에 내걸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처자식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오나라의 일은 제가 그 속사정을 압니다. 공자의 용맹이면 능히 합려를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와 함께 오나라로 가지 않는 것입니까?”
경기가 요리의 말을 진실로 믿었다. 3개월 동안 병사를 충분히 훈련시킨 뒤 드디어 오나라로 가게 되었다. 장강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힘이 부친 나머지 경기의 위쪽에 앉아 있던 요리가 문득 바람의 힘을 이용해 창으로 경기의 모자를 떨어뜨리고는 곧이어 경기의 머리를 찔렀다. 경기가 고개를 돌려 머리를 찌른 창을 빼냈다. 곧 요리의 머리를 손에 틀어쥔 채 여러 차례 물속에 처박았다. 연후 그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이같이 감탄했다.
“아, 참으로 천하의 용사다. 감히 창날을 내 머리 위에 대다니!”
경기의 시종들이 요리를 죽이려 하자 경기가 저지했다.
“이 사람은 천하의 용사다. 어찌 하루에 두 사람의 용사를 죽일 수 있는가!”
그러고는 시종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그가 가히 오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이로써 그의 충성을 표창하도록 하라.”
말을 마친 후 경기는 곧바로 죽었다. 요리가 장강을 건너 강릉(江陵)에 도착한 뒤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경기의 시종들이 물었다.
“왜 떠나지 않는 것인가?”
요리가 대답했다.
“처자식을 죽여 군주를 섬겼으니 인(仁)에 부합하지 않고, 새 군주를 위해 옛 군주의 자식을 죽였으니 의(義)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음을 중시하면서도 불의를 천하게 여긴다. 지금 내가 목숨을 탐하여 덕행을 버리면 이 또한 도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처럼 3가지 추악한 일을 했으니 무슨 얼굴로 천하의 현자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경기의 종자가 곧 그를 구해내자 요리가 이같이 말했다.
“내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기의 수종이 권했다.
“그대는 죽지 말고 오왕이 내리는 작록을 얻도록 하시오.”
요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수족을 자른 뒤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요리의 고육계는 너무 처참해 예로부터 많은 비판대상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다. 《춘추좌전》에 따르면 경기는 요리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줄곧 초나라에 머물고 있다가 오왕 부차 때 오나라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요리는 전설적인 인물일 공산이 크다. 《사기》 〈추양열전〉에 그의 이름이 나오기는 한다.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전한 초기에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음을 시사한다.
고육계는 서구인이 선호하는 윈윈 전략과 통하는 바가 있다.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익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마다 동일한 사물에 대한 가치평가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컨대 동전의 앞이 나오면 2,000원을 얻고, 뒤가 나오면 1,000원을 내는 게임을 할 경우 거의 모든 사람이 참여한다. 그러나 앞이 나오면 2억 원을 얻고, 뒤가 나오면 1억 원을 내는 게임을 할 경우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을 빼고는 대부분 참여하기를 꺼린다. 돈이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게임을 행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 ‘횡재’가 나는 게임에 열광할 것이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이길 확률이 똑같이 50퍼센트인데도 1,000원과 1억 원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장자》 〈달생〉에 이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담은 이야기가 나온다.
“별 가치가 없는 기왓장을 경품으로 내건 놀이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자도 은이나 동으로 만든 혁대 고리를 경품으로 내걸면 마음이 떨려 두려워한다. 황금을 내걸면 마음이 이내 어두워져 혼란에 빠진다. 기교는 똑같은데도 놓치면 아깝다는 애착심으로 인해 외물을 중시하며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외물을 중시하면 이내 내면의 마음이 졸렬하게 된다!”
고육계는 말 그대로 당사자에게 매우 고통스럽고 위험한 계책이다. 더구나 지모가 뛰어난 사람에게는 이런 계책이 통하지 않는다. 계책이 간파될 경우 오히려 그에 따른 당사자의 희생과 고통만 커질 뿐이다. 전한시대 말기 대유학자 양웅(揚雄)이 《법언》에서 경기를 살해한 요리를 포함해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자객을 비판한 이유다. 너무 처참한 고육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이 비판했다.
“춘추시대 말기 요리는 거미와 벌레처럼 자신의 수족을 자르며 경기를 척살한 뒤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섭정(聶政)은 장사의 기개로 한나라 재상 협루(俠累)를 척살한 뒤 죽었다. 전국시대 말기 형가(荊軻)가 자객이 되어 진시황을 척살하려다 죽었다. 이들 모두 의롭다고 할 수 없다. 특히 형가의 경우는 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개 도적에 불과할 뿐이다.”
양웅의 평가는 진시황을 천하의 폭군으로 간주하고, 형가를 의협으로 평가한 전한 말기의 세론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양웅이 손가락질을 당한 이유다. 그러나 북송의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제하면서 양웅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이 보여준 사사로운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자신의 7족이 어찌될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고 1척 8푼의 비수로 진왕 정을 척살하고자 했다. 이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형가를 일개 도적으로 비판한 양웅의 지적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다!”
사마광이 형가를 비판한 잣대는 양웅과 약간 차이가 있으나 대동소이한 것이다. 21세기 관점에서 볼 때 탁월한 것은 양웅의 평가다. 그는 국가대의 내지 천하대의와 같은 보다 거시적인 차원의 잣대를 요구했다. 요리와 섭정, 형가 등은 전적으로 사적인 의리 차원에 머문 까닭에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던 것이다.
조직폭력배들에게도 사적인 의리를 논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 수긍할 경우 국가대의 내지 천하대의가 무너지게 된다. 자객은 협객(俠客)과 달리 아무리 개인적으로 좋은 목적과 명분을 내걸지라도 가장 극단적인 방법인 척살을 동원하는 까닭에 수단 자체를 미화할 수는 없다. 자로는 모시던 주군을 위해 갓끈을 매며 분투하다 죽었다. 전형적인 협객이다. 유가에서도 협객을 높이 평가한다. 자로와 같이 충직한 협객을 흔히 유협(儒俠)으로 평했다. 인의도덕을 앞세운 최고 수준의 협객을 말한다. 유가 사상으로 무장한 무인을 유장(儒將)으로 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적벽대전>
백만 대군을 호언했던 원소를 무너뜨리고 중원(中原)의 주인이 된 조조는 사해(四海:천하)를 모두 손에 넣고자 대군을 일으켜 형주의 유표와 강동(江東)의 손권, 그리고 자신의 평생의 적인 유비를 공격한다. 유표 사후, 유표의 후계자가 된 차남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유비는 신야와 번성을 버리고 강하로 달아나 손권과 동맹을 맺어 조조군에 맞서게 된다. 당시 손권군의 막료(幕僚)들 중 대부분이 조조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겨 항복을 주장하는데, 오직 노숙과 주유만이 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때, 유비의 군사(軍師) 제갈량이 동오로 건너가서 항복을 주장하는 막료들을 기막힌 설전(舌戰)으로 굴복시키고, 손권을 격동(激動)시켜 조조군에 맞서게 한다. 주유가 제갈량의 지혜를 시기하여 제갈량을 여러 번 위기에 내몰지만 제갈량은 매번 지혜로 위기를 벗어나고, 안개를 이용해 조조군의 화살을 10만 개나 얻어오면서 끝내는 주유마저 승복시키고 만다. 이때 제갈량은 화공(火攻)을 진언하여 주유는 황개에게 고육계(苦肉計)를 시행하고 제갈량은 조조의 심리를 정확하게 헤아려 사항계(詐降計)가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방통에게 사주하여 조조에게 배를 한데 묶는 연환계(連環計)를 시행한다.
이러한 계략을 정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 제갈량은 조조나 주유보다는 한수 앞지르는 계략으로 항상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신과 같은 모습은 한 겨울에 동남풍(東南風)을 부르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결국 조조는 화공에 당해 83만의 대군이 거의 전멸하는 참패를 당하고 허도로 돌아가고, 주유는 남군에서 조조가 남긴 사촌동생 조인과 혈전을 벌인다. 그 둘이 싸우는 동안에 제갈량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어서 형주와 양양, 남군 등의 형주의 요지를 전부 점령하게 된다.
실제 노숙과 소설 속 노숙의 차이점
나관중의 붓 아래 표현된 노숙은 온화하고 우아하며, 충성스럽고 솔직하고, 덕성스러운 기풍이 다분하다. 그러나 솔직함이 너무 지나쳐 심지어 좀 멍청할 정도이다.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제갈량과 주유는 여러 차례 불꽃 튀는 지혜 다툼을 벌인다. 중간에 처한 노숙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진위와 허실을 분별하지 못한 채 단지 두 사람 사이의 눈앞에 나타난 모순을 평정하는 중재인 역할만 한다.
제갈량이 풀 배로 10만 개의 화살을 얻으려고 할 때, 제갈량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그의 계책이 뭔지 몰랐으며 제갈량이 배 안으로 불러들여도 무슨 뜻으로 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갈량이 캄캄한 안개 속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게 하니, 놀란 노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조군의 공격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조조가 채화(蔡和)와 채중(蔡中)을 동오에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케 하고, 주유는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이 두 사람을 역이용하여 거짓 소식을 전하게 할 때도 제갈량은 이미 그것을 간파했으나 노숙은 뒤늦게야 겨우 깨닫는다.
주유가 고육계(苦肉計)로 황개를 매질할 때도 제갈량이 알려주어서야 깨닫는다. 수차에 걸쳐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도 노숙은 제갈량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종종 제갈량에게 대책 없이 설득만 당한다. 두 번째 형주를 돌려주기를 요구했을 때는 제갈량이 서천을 뺏으면 형주를 다시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문서를 써 주자 노숙은 어쩔 도리 없이 그대로 따른다. 세 번째 형주를 요구했을 때도 유비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대로 계속 빌려주는 요구를 승낙하고 만다.
이처럼 노숙은 참으로 멍청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가 사서에는 없는 것들이고, 멍청이 노숙이란 형상도 역사적 기재와 부합되지 않는다. 결국 나관중이 제갈량의 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허구화한 것들이다.
역사상의 노숙은 조금도 멍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 식견이 높고 재능이 걸출한 총명한 인물이었다. 『삼국지ㆍ노숙전』 배주에서 인용한 『오서(吳書)』에는, ‘노숙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숙하며, ······ 군사를 잘 다스리고, 금령은 반드시 행하고, ······ 또 담론을 잘 하고, 문장에도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넓고 원대했으며, 현명함이 다른 이들 보다 뛰어났다. 주유가 죽은 후로는 노숙이 최고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노숙은 조조의 100만 대군이 국경까지 밀어닥치는 위급한 상황 아래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다수의 의견을 힘써 물리치고 조조에게 대항하기를 끝까지 견지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 유비를 찾아가 함께 조조에게 맞서자는 동맹을 맺었으며, 특히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는 차원 높은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조조에게 있어서 강력한 적을 하나 더 첨가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땅바닥에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한다. 그래서 주유는 죽음을 앞에 두고 손권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노숙은 지모와 책략이 임무를 맡기에 충분하니, 바라건대 저를 대신해 중용하소서.”라 하였다. 노숙은 주유의 뒤를 이어 동오의 대도독이 되었고 강동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활약을 했다.
송나라 사람 공평중(孔平仲)은 「자염장군(紫髥將軍)」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여기서 ‘노씨네 무서운 아이’란 바로 노숙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상의 노숙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모사꾼이고 장령이며, 손꼽아 셀 수 있는 극소수의 영웅호걸 중 한 명이었다. 나관중이 비록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조조를 막자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 노숙의 일을 서술했다 할지라도, 소설 속 곳곳에서 주유와 제갈량에 비해 한참 낮은 위치로 깎아내렸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모습을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독자들 뇌리에 남은 노숙은 귀여울 정도로 멍청하고 우스울 정도로 어리석은 정직하고 무던한 형상이 되었다. 예술적 형상으로서의 노숙이란 인물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존재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상 재간 있는 군 통수자로서의 노숙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조조의 《손자병법》 응용
조조가 새롭게 편제한 《손자약해》는 첫 편인 〈시계〉의 첫머리에서 병도의 기본 이치를 언급한 뒤 〈작전(作戰)〉과 〈모공(謀攻)〉 등에서 구체적인 방략인 전략과 실전에 사용하는 전술로 나누어 병법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손자약해》에 나오는 전략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지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모(伐謀)다. 적의 속셈을 미리 읽고 사전에 그 의도를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외교수단을 강구해 적을 고립시킴으로써 침략의도와 저항의지를 좌절시킨다. 이것마저 안 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군사를 동원하게 된다. 〈모공〉의 첫머리에서 이를 논하고 있다. 둘째, 전쟁선포로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을 경우 온전하게 승리를 거두는 전승(全勝)이다. 곧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부전승을 말한다. 이 또한 〈모공〉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셋째, 신속히 싸움을 끝내는 속전(速戰)이다. 승리를 할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패할지라도 속전으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전〉에서 이를 집중 논의하고 있다.
전술은 제4편의 〈군형(軍形)〉에서 제13편의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가지다. 10가지 전술 모두 강약과 진퇴, 완급 등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루어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군형〉은 주객(主客), 〈병세(兵勢)〉는 음양, 〈허실(虛實)〉은 진퇴, 〈군쟁(軍爭)〉은 곡직(曲直), 〈구변(九變)〉은 득실(得失), 〈행군(行軍)〉은 공수(攻守), 〈지형(地形)〉은 완급, 〈구지〉는 명암(明暗), 〈화공(火攻)〉은 강약, 〈용간〉은 상벌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장수의 용병술과 관련된 것이다.
조조는 손자병법을 주석하면서 10가지 전술을 상황에 따라 정병(正兵)과 기병(奇兵)을 적절히 배합하는 기정병용(奇正幷用)의 용병술로 풀이했다. 마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모든 경제원리를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요약해놓은 것과 같다. 정규군을 뜻하는 정병은 ‘보이는 손’, 비정규군인 기병은 ‘보이지 않는 손’에 해당한다. 《손자약해》에 나오는 10가지 전술 모두 아군과 적군의 상대적인 우열을 토대로 승리를 이끌어내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한 결과다.
《손자약해》가 역설한 궤도의 가장 대표적인 전술은 기병과 의병(疑兵)이다. 정병도 적이 대비하는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기병 및 의병보다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적이 지리멸렬하여 스스로 무너지는 자궤(自潰)의 모습을 보일 때가 그렇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조조가 무정형의 궤도를 주장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의병은 넓게 보아 기병의 일종으로 적을 미혹시키는 일체의 전술을 말한다.
정병과 기병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첫째, 전술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인 작전 지침 및 병법의 원칙에 입각해 전투를 벌이는 것을 정병,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기병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부대편제 측면에서 볼 때 경계와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는 정규군을 정병, 경무장으로 기동력을 중시하는 돌격대를 기병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공격 측면에서 볼 때 정면에서 선전포고를 한 뒤 정규공격을 하는 것을 정병, 좌우 측면 및 배후에서 매복 및 유격을 행하는 것을 기병이라 할 수 있다.
기병은 적의 허점을 노리는 출기불의(出其不意)와 적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는 공기불비(攻其不備) 등을 위주로 하는 전략전술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현대전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싸움의 규모와 형세를 떠나 승리의 관건은 대부분 기병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이 허허실실(虛虛實實)이고 임기응변의 핵심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은 대개 총력전으로 전개되는 만큼 아무리 기병을 잘 운용할지라도 정병에서 크게 차이가 날 경우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 사서 등에 나타난 정병의 대표적인 계책으로는 크게 견성계(堅城計), 청야계(淸野計), 사수계(死守計), 사지계(死地計), 지구계(持久計), 신속계(神速計), 화공계(火攻計), 수공계(水攻計) 등을 들 수 있다.
정병은 병서에 나오는 통상적인 계책으로 어느 전투에서나 대적하고 있는 양편 모두 똑같이 구사한다. 병력이 비슷할 경우에는 정병만으로는 승부를 가릴 수가 없다.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는 것은 주로 기병과 의병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적의 병력이 아군보다 우세할 경우 반드시 기병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조조가 구사한 전술에 관련해 가장 풍부한 일화를 싣고 있는 책은 《삼국연의》다. 여기에 수많은 기병과 의병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첩자를 보내 계교를 꾸미게 한 뒤 승리를 견인하는 연환계(連環計), 적의 내부를 이간하는 반간계(反間計), 미녀를 동원해 적장을 미혹케 만드는 미인계, 아군의 손실을 감수하며 꾸며내는 고육계(苦肉計), 거짓으로 투항하는 사항계(詐降計), 패한 척 도주하며 적을 유인하는 사패계(詐敗計), 거짓으로 호언장담하는 사칭계(詐稱計), 병을 칭해 적을 안심시키는 사병계(詐病計), 복병에 대한 적의 불안한 심리를 역이용하는 공성계(空城計),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서쪽으로 치는 성동격서의 양성계(揚聲計), 현대 게릴라전과 같은 개념의 유병계(遊兵計), 적장을 격동시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격장계(激將計), 무기를 내려놓아 적을 유도하는 타도계(拖刀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차도계(借刀計), 계책을 써 적의 무기를 획득하는 차전계(借箭計), 사방으로 복병을 깔아두는 십면매복계(十面埋伏計), 두 강적을 이간하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이호경식계(二虎競食計), 강한 적을 이용해 약한 적을 궤멸시키는 구호탄랑계(驅虎呑狼計), 길을 빌려 적을 치는 가도멸괵계(假道滅虢計), 싸울 때 주객의 위치를 뒤바꿔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반객위주계(反客爲主計), 첨단무기로 적을 경악하게 만드는 목우경적계(木偶驚敵計), 상대의 계책을 역이용해 공격하는 장계취계(將計就計)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모든 전술은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명명되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해 말하면 흔히 허허실실로 상징되는 허실계(虛實計)라고 할 수 있다. 허허실실은 모든 병서가 강조하는 전술전략을 한마디로 응축한 키워드에 해당한다. 조조가 말한 무정형의 궤도와 동의어다.
《손자약해》의 궤도를 간계 내지 휼계로 해석한 것은 임기응변 내지 허허실실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병도는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치와 취지를 같이한다. 모든 병가가 단순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을 추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조조가 평소에는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출병한다는 뜻의 집이시동(戢而時動)을 역설했던 이유다.
《삼국연의》에는 조조가 시종 기병과 의병을 구사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사서에 나오는 기록은 이와 많이 다르다. 조조가 기병과 의병을 많이 구사한 것은 사실이나 기본 원칙만큼은 정병에 있었다. 그가 구사한 정병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속전속결을 위주로 한 신속계라 할 수 있다. 사마의가 지구계를 이용해 제갈량의 중원진출을 저지한 것은 조조와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조조의 신속계와 사마의의 지구계는 상황에 따라 정병이 얼마나 다양하게 구사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조조는 정병의 신속계를 매우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서면 7개월을 넘기지 않았다.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충실히 좇은 결과다. 신속계와 관련한 〈작전〉의 대목이다.
“무릇 용병을 할 경우 최소한 전차 1,000대, 치중차 1,000대, 무장한 병사 10만 명이 동원된다. 원정을 할 경우 국경에서 1,000리나 되는 먼 거리에도 군량과 군수품을 수송해야 하는 부담 또한 막대하다. 전방과 후방에 들어가는 군사비용, 외교사절 등에 대한 접대비, 아교와 옻칠 등 무기와 장비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 전차나 갑옷을 만들고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 등을 포함하면 하루에도 1,000금의 비용이 들어간다. 이런 여건이 마련된 연후에 비로소 1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 군사를 동원해 전쟁을 치를 때는 반드시 신속히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싸우는 날이 길어지면 군사가 피로에 지쳐 예기가 꺾이고, 적의 성을 칠 때 병력 소모도 가장 많다. 군대가 나라 밖에서 전쟁을 치르는 폭사(暴師)가 길어지면 재정이 부족해진다. 무릇 군사가 피로에 지쳐 예기가 꺾이고, 병력 소모가 많아져 물자가 바닥나면 이웃나라가 빈틈을 타 침공할 것이다. 그리되면 아무리 뛰어난 지모를 자랑하는 자일지라도 뒷수습을 잘할 수 없다.”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는 우선 외교전을 펼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써야만 한다. 막상 전쟁에 들어가면 활과 화살, 전차, 갑옷, 식량 등 수많은 군수물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군수물자는 전황에 따라 가격이 수시로 변동하므로 더욱 많은 돈이 들게 된다. 젊은 장정이 동원되므로 농사를 비롯한 생산활동이 저하된다. 《손자병법》은 하루 평균 1,000금의 비용이 든다고 했으나 그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가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셈이다. 이같이 엄청난 희생을 딛고 일어서야 겨우 10만 명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작전〉에서 용병은 신속히 이기는 것을 귀히 여기고 오래 끄는 것을 꺼린다고 했다. 원문은 ‘병귀승불귀구(兵貴勝不貴久)’다. 이 구절은 모든 병서가 하나같이 역설하는 ‘병귀신속(兵貴神速)’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전쟁은 아무리 우수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확보하고 있을지라도 지구전으로 나아가면 이내 병력과 자원을 모두 고갈시키게 된다. 민력(民力)이 피폐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표적인 사례로 오환족 정벌을 들 수 있다. 당시 조조는 오환족 정벌에 나서면서 큰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철군하려 하자 곽가가 병귀신속을 거론하며 극구 만류했다.
“지금 우리는 천리를 달려와 기습하기에는 치중이 많고 유리한 전기(戰機)를 잡기도 쉽지 않은 터에 적들은 이미 소식을 듣고 엄히 방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치중을 남겨둔 채 먼저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로 하여금 하루에 이틀 길을 달려 저들의 빈틈을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내 오환족을 정벌할 수 있었다. 이후 오환족 정벌은 조조가 형주를 손에 넣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후고지우를 미리 제거한 덕분이다. 조조는 〈작전〉에 주석을 달면서 병귀신속을 이같이 풀이했다.
“첩자를 매수하고 승전 이후의 포상비용 등은 전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를 합칠 경우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싸움을 거듭하면 칼이 무뎌지고 화살도 다 떨어지게 된다. 지구전으로 이어지면 결국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잇따랐다. 조조는 거의 모든 삶을 전장에서 보냈다. 그는 이겼을 때나 졌을 때나 병귀신속의 원칙을 엄수했다. 특히 패했을 때는 신속히 결단해 철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중을 포기할 때 계륵의 미련을 버리고 신속히 퇴각한 것이 그 좋은 실례다. 관동의 호걸들이 동탁토벌의 연합군을 결성했을 때 조조가 제시한 계책이 바로 속전속결에 의한 ‘신속계’였다.
조조는 관중의 장수(張繡)가 형주의 유표와 손을 잡고 완성으로 진출해 허도를 기습하려 하자 곧바로 여포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군사를 돌렸다. 원소와 건곤일척의 관도대전을 벌일 때에도 속전속결 원칙에 입각해 대승을 거두었지만 곧바로 허도로 돌아왔다.
안철수가 외롭다
광주일보 문순태 칼럼 2014년 05월 21일(수)
한승원 형, 자네가 지난번 칼럼에서 “광주가 시험에 들었다.”고 한 것에 참으로 깊이 통감하네.
광주를 사랑하는 늙은이로서 나도 안타깝고 답답하네. 어제는 무등산 밑 조촐한 술집에서, 등산복 차림의 70대 노인과 20대 젊은이가 새정치민주연합의 광주시장 공천 결과를 놓고 입씨름 하는 광경을 보았다네.
노인: “누가 봐도 밀실 야합 낙하산 공천이여. 이건 새정치가 아니라 구태정치란 말이여.”
청년; “경선으로는 개혁적인 인물을 선택할 수 없지요. 이젠 광주에 새 인물이 필요해요.”
노인; “정치적 비중으로 따지면 강 시장이나 이 의원만큼 무게 있는 인물이 없지 않은가.”
청년; “장관, 국회의원 다 했으니 이젠 중앙에서 활동하고 광주는 새 인물을 키워야지요.”
두 사람의 논쟁을 보면서 나는 광주민심이 안철수 지지와 반대로 분열되고 있음을 알았네.
2년 전 새정치 아이콘 안철수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었네. 민주당이 대선에서 패하자 사람들은 “안철수로 단일화가 되었더라면 당선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지.
또 “안철수가 적극적으로 문재인을 지원했더라면 문재인이 당선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네. 그만큼 안철수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광주시민들에게 희망적인 대안세력이었네.
대선 패배로 민주당이 지리멸렬, 지지율이 바닥이었을 때도, 안철수 신당 호남 지지율은 민주당보다 훨씬 높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안철수는 호남에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었네.
마침내 50대 50의 지분으로 합당을 했네. 그러나 안철수는 17개 광역단체장 중에서 겨우 광주시장 한 곳을 전략공천 했을 뿐이네. 안철수는 실리면에서 완전 패배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도로 민주당’이 되었지 않은가. 안철수의 새정치 꿈은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단단한 기득권의 벽을 뚫으려다 만신창이가 된 거지.
이윤석 수석대변인이 “당을 떠나라.”고 하지 않았는가. 5·18 때 광주에 온 안철수는 봉변까지 당했다네. 물론 안철수에게 소리치고 계란을 던진 행위가 광주 전체의 민심은 아니지만 상처는 상처지.
당에서 조차 고립무원 처지가 된 안철수는 합당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혹자는 정치초년생 안철수가 정치고단자들에게 당한 것이라고 하더군.
안철수는 지금 당 안팎으로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받고 있네. 언론에서조차 안철수만 집중공격을 하더군. 안철수 죽이기에 힘을 모으는 것처럼 느껴졌네.
이제 광주 선거는 윤장현의 싸움이 아니라, 안철수·김한길 두 당 대표의 싸움이 되었네. 광주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택하든지 거부하든지 해야하네.
광주는 안철수의 마지막 보루가 된 셈이지. 광주에서 지면 안철수는 정치적 뿌리가 뽑히게 되고 당에서도 밀려날 수 있지. 광주가 그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게 되었다네.
안철수가 무너지면 정권교체 대안세력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거네. 이럴 때 광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전략공천 때문에, 오랫동안 애증으로 품어온 민주당의 몸통을 잘라버려야 하는가?
어쩌다가 광주가 이런 고육계(苦肉計)의 덫에 걸렸는지 모르겠네. 소부· 허유(巢父·許由)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한승원 형, 금강경 게송에 춘란추국(春蘭秋菊)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봄에는 난초요 가을에는 국화로, 각자형향(各自馨香)이라, 난초와 국화는 모양도 향기도 각기 달라,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가 없지.
춘화추월(春花秋月)도 마찬가지네. 난초도 국화도, 꽃도 달빛도 다 소중하여 어느 것을 특별히 좋아할 수가 없지 않은가. 허나, 진정 하늘의 뜻이라면 나는 무구 순결한 난초를 택하겠네.
이백(李白)이 답설심매(踏雪尋梅)에 빠진 맹호연(孟浩然)에게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화사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너무도 정치(淸致)하여 만고에 쌓인 티끌을 깨끗이 씻어줄 것만 같아서”라고 답하지 않았다던가. 〈소설가〉
34 계 고육계(苦肉計)
이 계는 사실 일종의 특수한 이간계(離間計)이다. 이 계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자해(自害)”는 사실이고 “타해(他害)”는 거짓이며,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한다. 아군 내부에 모순이 심화된 듯한 거짓 모습을 만든 후 사람을 보내 박해를 받은 듯 거짓 호소하고, 기회를 이용 적의 심장부에 진입해서 간첩활동을 한다.
*人不自害, 受害必眞. (인부자해, 수해필진.)
“사람은 스스로를 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심리상태이다. “고육계”는 바로 이러한 심리상태를 이용해서, 박해를 받았다는 거짓 상황을 조성하여 상대를 미혹하고 상대의 신임을 얻은 후 예정된 계획을 실시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원 문
人不自害, 受害必眞; 假眞眞假, 間以得行. 童蒙之吉, 順以巽也. (인부자해, 수해필진; 가진진가, 간이득행. 동몽지길, 순이손야.)
번 역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상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상해를 입게 되면 적은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아군이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혼란스럽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거짓을 진실로 믿게 하면, 적을 이간시키는 계략은 이미 이루어지게 된다. 어린 아이를 속이듯 그렇게 적을 미혹시키면 순조롭게 작전을 진행할 수 있다.
(역자 주: 童蒙之吉, 順以巽也는 <주역: 몽(蒙)> 괘에서 나왔다. 즉, 유치하고 몽매한 사람들이 길(吉)한 것은 그들이 유순하고 복종하기 때문이다. 巽(손)은 겸손, 복종의 뜻이다.)
해 설
이 계는 <삼국연의(三國演義)>: “주유가 예를 행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 고육계를 기꺼이 행해 주신다면 강동(江東)의 큰 홍복이 될 것입니다’”에서 나왔다.
이 계는 사실 일종의 특수한 이간계(離間計)이다. 이 계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자해(自害)”는 사실이고 “타해(他害)”는 거짓이며,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한다. 아군 내부에 모순이 심화된 듯한 거짓 모습을 만든 후 사람을 보내 박해를 받은 듯 거짓 호소하고, 기회를 이용 적의 심장부에 진입해서 간첩활동을 한다.
생활에서의 활용
<36계>와 군사-왕좌(王佐), 스스로 팔을 자르다
“고육계”는 자신을 상해하여 적의 신임을 얻으려는 일종의 계략으로,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치밀하여야 하며 또한 일정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세상에서 흔히 쓰는 속어로 표현하면, “자식을 아껴서는 늑대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 없다(舍不得孩子, 套不着狼. 사부득해자, 투불착랑.)”이다.
남송(南宋) 시대, 금(金) 나라가 남침해 와, 김올술(金兀術)과 악비(岳飛)가 주선진(朱仙鎭)에서 에서 대치하며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김올술에게 양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육문룡(陸文龍), 나이 16 세로 용맹이 뛰어나 악비군이 상대하기 무척 힘든 장수였다. 육문룡은 본래 송나라 노안주(潞安州) 절도사 육등(陸登)의 아들이었는데, 김올술이 노안주를 함락할 때, 육등 부부는 둘 다 순직하였고, 김올술은 아직 어린 애기였던 육문룡과 유모를 데리고 돌아가 양아들로 삼았다. 육문룡은 자신의 가족 내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느 날, 악비가 적을 물리칠 계책을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장인 왕좌가 장막 안으로 들어 왔다. 악비는 왕좌의 안색이 납처럼 검고 오른 쪽 팔이 짤려져 나간 것(이미 약을 바르고 묶었지만)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급히 물었다. 원래 왕좌는 금나라 진영에 가서 육문룡을 반금(反金)으로 회유할 생각이었다. 김올술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팔을 자르는 계책을 취한 것이었다. 악비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이 용솟음쳤다.
왕좌는 밤을 도와 금 진영으로 도착해 김올술에게 말했다: “소신은 본래 양마(楊麽)의 부하로 벼슬이 차승후(車勝侯)였습니다. 양마가 실패한 후 저는 할 수 없이 악비에게 귀순하였습니다. 어제 밤, 장중에서 회의를 할 때, 소신은, 금병이 용맹하여 막아 내기 어려우니 화친을 맺는 것이 좋다고 진언하였습니다. 악비는 듣자 마자 대노하여 저의 오른 팔을 베도록 명하면서, 저에게 금 진영에 가서 악비의 군이 가까운 시일 내 낭주(狼主 역자 주: 북방 민족의 군주를 일컷는 말)를 생포하고 금 진영을 쑥대 밭으로 만들겠다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리 오지 않으면 그는 제 남은 팔 하나도 베어 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해서 제가 이렇게 낭주에게 애원하러 온 것입니다.”
김올술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불운한 사람(苦人兒)”이라고 부르면서 진영에 머물도록 했다. 왕좌는 금 진영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 육문룡의 유모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설득, 그녀와 함께 육문룡에게 그의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육문룡은 자기의 신세를 알게 된 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금나라 적도를 주살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왕좌는 그에게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일을 그르친다면서 때를 기다려 행동할 것을 주문하였다.
금나라 군은 이 때, 엄청난 위력을 가진 대포를 운반해 와, 심야에 악비 군 진영을 포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육문룡이 화살로 편지를 쏴 보내 악비 군이 재난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육문룡과 악비, 그리고 유모는 함께 송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왕좌는 자기 팔을 짜름으로써, 마침내 맹장 육문룡을 송 진영으로 귀순시켰으니 실로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다 할 것이다.
<36계>와 비즈니스-도요타의 고육계
시장 경쟁에 있어서 “고육계”는 기업과 그 제품의 신용과 명예를 빠른 시일 내에 제고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다. “시티즌 시계”는 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 공중을 날으는 비행기에서 시계를 던지는 등의 파괴성 시험 광고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기업은 제품의 품질문제가 일어 나면, 바로 신속히 대응하여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수중으로부터도 제품을 회수하여 폐기하거나 개량해 주는 등, 매우 정성을 쏟는 것을 볼 수 있다.
1960 년, 도요타 자동차는 크라운 승용차를 시장에 내어 놓았다. 시장 조사 후, 마침내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회사가 막 미국 시장 진출을 자축하고 있을 때, 미국 시장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 왔다: 즉, 크라운 승용차의 엔진 성능이 좋지 않아 고속 주행 시 성능이 갑자기 떨어져미국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리상들이 이 차에 대해 그다지 믿지 않게 되었다.
도요타의 경영진은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기 보다는 도요타를 다시 일으켜 미국 시장에 재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불굴의 정신으로 신제품을 개발하도록 노력하였으며 또한 기술혁신, 대대적인 품질 제고에 나섰다. 그 다음으로는 대규모의 “파괴성 시험”을 진행하고는 그것을 광고로 제작하여 미국 시장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가지 세트의 “파괴성 시험”으로 이루어진 광고 시리즈가 나오게 되었다.
첫 번 째 광고에는, TV 화면에 질주하는 크라운 승용차가 등장하고, 발판을 돌진하여 25 미터 허공을 날은 후, 산뜻하게 착지하게 된다. 악세레이터를 밟자 다시 고속으로 전진해 나간다.
두 번 째 광고에는, 크라운 승용차 한 대를 십 수 미터의 절벽에서 밀어 떨어 뜨리자 그 차는 땅에 떨어진 후 여러 차례 굴러 가, 차의 지붕이 망가지고 후드가 일부 떨어져 나가게 될 정도로 충격량이 컸다. 그러나 TV 시청자들은, 굴러 떨어져 완전히 망가진 크라운 승용차가 시동을 걸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멀리 질주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세 번 째 광고는 크라운 승용차가 두 편으로 나눠 축구 시합을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로 급커브, 급정거 및 쾌속발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광고들이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크라운 승용차는 어떠한 상황의 운전에도 모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괴성 광고”는 미국시장에서 근 일 년간 방송되었는데 그 결과 크라운 브랜드는 물론 도요타 자동차 회사 전체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제고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객들의 고정관념이 사라졌고 대리상들의 신임도 회복되었다. 도요타-크라운은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엔진 성능이 우수하다는 인식이 소비자에게 자리 잡자 이 모델은 한 때 미국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가 되었다.
<36계>와 처세-사마상여(司馬相如), 점원이 되다
“고육계”를 사용할 때는 매우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고육계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상해해야 하며, 때로는 이러한 자기 상해가 몹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승리의 과실 중에는 또한 피와 눈물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고육계는 “고통스러운(苦)” 계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위험한(險)” 계책이다. 만약에 적이 강심장의 소유자이거나 지모가 뛰어 나고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려 들지 않는다. 일단 이 계책이 간파되면 자기 자신을 상해한 고통이 헛고생이 될 뿐 아니라 생명도 보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계를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가급적 이 계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한(漢) 시대 대 사부가(辭賦家) 사마상여는, 사천(四川)을 떠나 사천(四川)을 떠나 유람을 다닐 때, 한 편의 <자허상림부(子虛上林賦)>로 천하에 이름을 얻었다. 박학하고 인품이 고상하였던 까닭에 그와 교류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사마상여는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예절에 구애받지 않으며, 사업에는 관심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어느 해, 사마상여는 유람에서 사천으로 돌아 와 성도(成都)로 가는 길에 임공(臨邛)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임공 현령은 오래 전부터 사마상여의 이름을 흠모하고 있었기에 그를 현 관아로 정중하게 초청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지 부호 탁왕손(卓王孫)은, 남들이 하듯 겉치례를 위해 명사를 사귀고 문화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또한 사마상여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상인의 범속함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실제로는 사마상여를 청하는 것이지만 명의상으로는 현령 왕길(王吉)을 초청하고 사마상여가 합석하는 식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사마상여는 본래 그러한 무식한 졸부를 벽안시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약정한 날이 되자 사마상여는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탁왕손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침내 현령 왕길이 직접 가서 그를 청하였다. 사마상여는 왕길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어서 탁왕손의 집에 오게 되었다. 탁왕손은 그의 옷 입은 형색을 보자 잠시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마상여는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크게 마시고 많이 먹으면서 왕길과 담소하는데만 신경을 썼다. 갑자기 내실에서부터 은은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 오자 사마상여는 일순간 담소를 멈추고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기 시작했다. 원래 이 것은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이 연주한 것이었다. 사마상여도 <봉구황(鳳求凰) 역자 주: 鳳(봉)은 봉황 수컷, 凰(황)은 봉황 암컷을 뜻함.)> 한 곡을 따라서 연주해 탁문군을 향한 애정의 뜻을 표현하였다. 탁문군도 사마상여의 모습과 재주를 흠모해 그날 밥으로 사마상여에게로 도망쳐 나와 서로 몸을 허하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둘은 함께 성도로 도망쳤다. 탁왕손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크게 노하여 그 두사람이 절대 가문으로 돌아 와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탁문군은 성도로 온 후에야 그녀의 남편이 명성이야 내외로 크게 나 있지만 집안이 무척 빈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할 바가 없어서, 그들은 임공으로 돌아가, 중간에 사람을 놓아 탁왕손에게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탁왕손은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거절하는 것이었다.
부부는 잠시 낙심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본래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 곧 한 가지 “절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이튿 날, 사마상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레, 말, 거문고와 탁문군의 장신구를 팔아 돈을 좀 마련 한 후, 탁왕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하나 빌려 조그만 주막을 열었다. 사마상여는 점원의 옷을 입고 소매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서, 주막 집 점원처럼 식탁과 의자를 닦고 물건들을 나르기도 하였다. 탁문군도 허름한 옷을 입고는 이리 저리 뛰면서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주막을 금방 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원근에 이름 높은 이 두 부부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러 왔다. 사마상여 부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왜냐 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자기들의 목적-즉, 완고해서 굽힐 줄 모르는 노인의 낯을 더럽히는 것-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몇 몇 친구들이 탁왕손에게 권했다: “따님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게. 게다가 사마상여는 그래도 관리 출신에다가 현령의 친구가 아닌가. 그가 지금은 빈한하지만 재주가 있으니 언젠가 빛을 볼 날이 곧 올 것일세. 그러니 그들에게 도움을 좀 주게. 무엇하러 그들이 저 고생을 하게 내버려 둔단 말인가?”
할 수 없이 탁왕순은 탁문군 부부에게 하인 두 명과 백 만 량의 돈을 주었고, 사마상여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하인과 돈을 챙겨서 성도로 돌아 가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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