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방

장마에는 폭포가 으뜸이다

한림정(신방현) 2012. 7. 11. 08:34

<장마에는 폭포가 으뜸이다!>

본격적인 장마로 산행이 힘들어지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산꾼들은 어디로 갈까? 이럴 때 수량이 풍부해진 인근 폭포를 찾아보는 것도 유익한 방법이다.

특히 금산 남이의 12폭포와 추부의 서대폭포, 영동의 옥계폭포는 장마철에 찾으면 폭포의 굉음과 주변 풍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갈수기 12폭포 모습>

<금산 남이 12폭포>

금산을 지나 성치산 무자치 계곡에 위치한 12폭포를 찾아가 보자. 12폭포라는 명칭은 많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는 12개의 폭포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금산(錦山)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줄인 말로 통하는데 그만큼 빼어난 경치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금강이 흐르는 줄기를 따라 금산이 이어지고 곳곳에 절경과 아름다운 지형을 일구어 놓았다. 대전 주변에서 금산을 찾아 산을 누비면 의외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쉽게 만난다. 여름의 폭염과 장마의 빗줄기 속에서 캐낸 노다지가 있다면 바로 남이의 12폭포가 아닌가 한다.

깊은 골짜기 속에 감춰져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비경! 바로 남이에 있는 성봉과 성치산을 아우른 12폭포 죽포동천(竹浦洞天)이다.

<장마 때 촬영한 죽포동천 12폭포 모습>

<12폭포 죽포동천(竹浦洞天) 각자>

높이 15m 정도의 폭포는 우선 크기와 수량 그리고 주변과의 조화에서 일품이다. 절벽을 타고 흐르는 폭포수의 물줄기를 상당히 먼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자락 사이에 위치한 폭포의 우람함이 대단하다.

폭포 밑에는 청뢰(晴雷)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하늘에 구름이 없는데도 천둥치는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폭포의 엄청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빗대어 적은 듯하다. 또한 하락(河落), 의하(疑河)라는 한자가 폭포 밑에 있는데 너무도 엄청난 수량에 내(川)인지 의심하여 의하(疑河)로 새겨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의하(疑河)>

<청뢰(晴雷)>

<하락(河落)>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맞닿아 있는 하늘과 어울려 너무도 멋있다. 여름에 폭포 밑에서 맞는 폭포수는 등줄기를 따갑게 하고 더위를 쫒는 청량제와 같다.

폭포 위에 오르면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는데 폭포 상단 오른쪽에는 죽포동천(竹浦洞天)이라 쓴 큰 글씨가 음각되어 계곡의 명칭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조그만 구멍으로 실을 드리우면 폭포 아래까지 내려갔다 하는데 지금은 막혀서 물이 고여 있다.

<12폭포 소폭포>

폭포 상류를 따라 오르면 넓은 암반에 계곡수가 흐르고 듬성듬성 작은 소(沼)가 무수히 있다. 넓은 암반의 양쪽에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편히 쉴 수 있다.

양지 바른 암반에는 세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명설(鳴雪), 운옥(雲玉), 풍패(風珮)이다.

명설(鳴雪)은 겨울에 내리는 실눈 내리는 소리를 표현한 듯 하며, 운옥(雲玉 또는 雲鶴)은 계곡에 낀 골안개를 표현했거나 선계에 드는 시작을 나타낸 것이고, 풍패(風珮)는 계곡에 부는 바람을 사람이 찬 옥에 부딪쳐 나는 소리 또는 절의 처마에 매달린 풍경 소리를 표현한 듯하다.

<풍패(風珮)>

<명설(鳴雪)>

<운옥(雲玉), 혹은 운학(雲鶴)>

중간에는 한시로 표현한 닳은 문자가 보이는데 12 폭포 골짜기의 풍광과 글자를 새긴 유래를 나타는데 폭포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노래한 것이고, 끝부분 구지(九池)와 소유천(小有天)은 도교에서 선계로 들어가는 끝이라는 곳으로 해석된다.

폭포 위쪽으로는 선계(仙界)라는 의미이고, 마지막 폭포에 산학(山鶴)이니 학을 타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형국이다.

금산문화원의 고증에 따르면 바위 각자들은 윤선거의 형 윤문거의 글씨로 추정(서예가 김현봉 추정)된다고 한다.

<한시>

윤문거(尹文擧, 1606~1672년)는 조선의 학자이며 윤증의 숙부이고 병자호란(1636년) 때 아버지 윤황을 따라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그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죽은 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석호집이 있다.

윤선거(尹宣擧, 1610∼1669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호는 산천재(山泉齋)이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재서원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재서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윤문거의 글씨라고 추정한다면 340년 전에 금산에 살던 아우 윤선거를 만나 12폭포의 자연 경관을 시와 글로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학자 윤문거, 윤선거 형제가 낙향하여 지내던 12폭포는 그들이 남긴 명문 각자로 후세에 전해진 셈이다.

<금용(錦龍)>

골짜기를 오르다 보면 상당히 큰 소(沼)를 지나는데 나무숲이 울창하고 기다란 폭포가 연결되어 있어 계곡 중 으뜸인 곳을 만난다.

바위 벽 쪽에는 옆으로 누운 초서 한자가 보이는데 금용(錦龍)으로 읽어진다.

아마도 용이 길게 누워 경치를 보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

너무 난해한 초서지만 글씨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무자치골은 뱀이 많다는 골짜기로 이름이 나 있고, 칡넝쿨이 없다고 전해진다.

예전 덩치가 큰 장수가 커다란 바위를 져 나르다가 폭포 위에서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바위를 놓쳤다고 한다.

장수는 화가 나서 근처의 칡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덩더꿍 바위(큰 폭포 위에 있는 구멍 뚫린 곳에서 바위를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위쪽에는 장수가 놓친 바위가 지금도 놓여 있으며, 장수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가재와 징개미(새우)가 있는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면 마지막 암반에 폭포가 있다.

물줄기의 흐름은 작지만 낙차 큰 폭포는 무척 아름답다.

<산학(山鶴)>

바위에 아름다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산학(山鶴)으로 보이며 마지막 폭포에서 학을 타고 우화등선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폭포의 위치가 암반에서 비스듬히 바라다 보이고 계곡 수에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진 바위가 쉼터로 제격이다. 화려한 필체가 다른 글씨와 다르다.

<12폭포 각자 모음>

☞ 12폭포로 가는 길 : 금산에서 진안 쪽으로 가다가 용수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흑암리 모티 마을 침수교에서 시작하거나, 신동 저수지가 있는 신동리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12폭포 가는 길 안내도>

<서대폭포>

서대산 중턱 개덕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서대폭포는 높이가 20미터 정도로 암벽을 배경으로 여름철에는 꽤 수량이 풍부하며 장관을 이룬다.

서산대사가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서대산에는 용바위, 장군바위, 마당바위, 노적봉 등 산세가 온후하고 웅장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건기에는 수량이 적지만 장마 때에는 대단한 수량을 자랑한다.

특히 대웅전 뒤편의 널찍한 평지에 떨어지는 굉음은 인근 주변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개덕사는 화려하지 않지만 비구니들이 많았던 절로 고요한 숲에 둘러싸여 상당히 깨끗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절 곳곳에 심어진 야생화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는다.

서대산은 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지만 남쪽은 평탄하고 부드러운 사면인데, 능선은 금강을 휘돌아 천태산으로 연결된다.

<해동지도에 표시된 서대산>

『신증동국여지승람』(금산)에 "서대산은 북방을 진수하고 진악산(進樂山)은 남방을 가리었다."고 하여 서대산이 금산군의 북쪽 경계이자 방어벽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서대라는 명칭은 먼저 산의 서쪽 기슭에 신라 문성왕 때 무양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서대사(西臺寺)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산)에 "서대사는 서대산에 있다. 옛날에는 상·중·하 세 개의 서대가 있었는데 중서대사(中西臺寺)는 지금 없어졌다."고 하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설에는 서쪽으로 커다란 누대처럼 산이 우뚝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산의 형상이 세 개의 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충천남도에서 가장 높으며(904m) 정상 일대는 병풍처럼 늘어선 능선이 암릉을 이뤄 장관이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으며, 암봉들이 산수화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동방의 태산’으로 칭송 받았다.

☞ 서대폭포 가는 길 : 마전 추부에서 옥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서대산 갈림길이 나온다.

드림랜드 가는 중에 우측으로 개덕사로 오르면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옥계폭포(박연폭포)>

옥계폭포는 깎아지른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무려 30m에 이르며 수려한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룬다. 난계 박연 선생은 폭포에서 피리를 연주하곤 했는데 바위틈에서 피어난 난초에 매료되어 난초의 '난'과 시내 '계'를 써서 호를 '난계(蘭溪)'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박연폭포라 부르기도 하는데 영동과 옥천에 걸쳐 산을 이루는 월이산(달이산) 남쪽 끝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에 있다.

폭포도 유명하지만 월이산 산행 코스도 유명하다. 산행은 폭포 주변의 협곡을 따라 오르면 월이산 종주 코스로 이어진다.

<옥계폭포>

옥계폭포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 일대를 두루 조망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금강이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을 휘도는 절경도 함께 한다. 또 갈기산, 천태산, 민주지산, 백화산 등 영동의 산이 조망되며 금산의 서대산과 옥천의 대성산을 볼 수 있다.

옥계폭포에는 예로부터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옥계의 '옥(玉)'자는 여자를 뜻하며 이 폭포는 음(陰)의 기운을 가진 여자폭포이다.

옛날 언제부터인지 폭포가 떨어지는 웅덩이에는 양의 기운을 가진 양바위가 생겼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하여 멀리 옮겨버렸다. 그런데 옮긴 후에 남자들이 객사하거나 사고로 죽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자 사람들은 다시 양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놓았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마을은 평온해졌다 한다.

☞ 옥계폭포 가는 길 : 옥천에서 심천으로 가다가 다리를 건너기 전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로 진입하여 천모산 골짜기로 들어서서 산길을 따라 약 1km 지점에 위치한다.

 

The River Sings - Enya

'산행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선계곡 선녀탕.  (0) 2012.07.31
한남정맥 8구간 산행..  (0) 2012.07.23
충북괴산의 칠보산 산행.  (0) 2012.07.04
설악산 산행 사진..  (0) 2012.06.18
방태산 산행..  (0) 2012.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