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봉우리 팔영산을 운무에 묻고 2009.2.22(일) 날씨 : 비 기온 : 섭씨 1~8도 산행거리 : 11km 산행시간 : 4시간
<산행경로>
<기다림> 아름다운 꽃도 잠시 멈추고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듯,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 조지아 오키프 -
<운무에 가려 팔영산은 아득하고>
<고흥의 끝자락에 핀 여덟 봉우리> 호남정맥의 긴 흐름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본다. 남해안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기암절경을 이룬 땅끝 기맥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멀리 한라를 응시하며 그 서운한 감정을 일으킨 팔영산! 고흥반도의 동쪽에 우뚝한 여덟 봉우리는 그 자태가 뛰어나고 기개가 우렁차다.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봉우리들의 조화는 산천경개가 귀신에 홀린 듯 홀연히 운무에 스쳐 지나기도 한다. 비록 우중에 자신의 몸매를 가리고 있지만 그 유래에 서린 비경은 아스라이 운무 속에 다가온다. 팔전산(八田山), 팔령산(八嶺山), 팔점산(八点山) 등으로 불렸으며, 산 정상에는 팔봉이 있는데 첫째는 유영봉(儒影峰), 둘째 성주봉(聖主峰), 셋째 생황봉(笙簧峰), 넷째 사자봉(獅子峰), 다섯째 오로봉(五老峰), 여섯째 두류봉(頭流峰), 일곱째 칠성봉(七星峰), 여덟째 적취봉(積翠峰)이다. 팔영산이라 불리게 된 유래는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가 멀리 한양에 까지 드리워져서 불렀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금닭이 울고 날이 밝아 오면서 붉은 햇살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팔봉이 마치 창파에 떨어진 인판(印版:인쇄판)과 같다 하여 그림자 영(影)자를 붙였다고 한다. 또한 옛날 중국 위나라 태화연간(太和年間 227~231)에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위주의 세수 대야에 비추어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보고 비로소 그림자 영자를 붙여 주었다고 전한다.
<강선폭포>
<선녀봉 신선대 오르는 암릉>
오래전 들렀던 팔영산의 기암절경을 떠올리기 힘든 우중 산행은 지나는 암릉과 절벽을 오르는 힘든 노정이다. 특히 처음 온 산우들은 보이지 않는 산길과 아슬아슬한 바위들을 지나기 힘든 모양이다. 쇠사슬로 매어진 절벽은 미끄럽고 비로 인하여 더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힘이 들기 때문이다. 역시 여행과 산행은 날씨의 영향이 엄청 크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비록 봄비지만 산정의 바람은 손과 온몸의 땀을 빼앗아 추위를 느끼고 일부는 체온이 떨어지는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오르막 중간 중간에 자그맣게 팻말로 적힌 명언들은 힘든 산길에서 청량제처럼 호흡을 고르게 한다. 1봉을 찾아 나선 선두를 따라잡는 후미의 느긋한 추월은 오리무중의 기암들 속에서 힘을 잃고 8봉을 모두 종주하려던 처음 계획은 6봉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아름답고 몸매 한 번 늘씬한 팔영산의 자취 보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풍성한 뒤풀이가 기다리는 능가사로 하산을 재촉한다. 탑재의 정자에는 다른 일행들이 점심을 즐기는데 능가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속도를 붙여 내달린다.
<맑은 날 팔영산 모습>
<성주봉 오르는 계단길>
<응진당>
능가사 응진당(應眞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단층건물이다. 원통형 두리기둥의 위에 외부로 2출목(二出目)을 둔 삼익공식의 공포를 짜고, 종량 위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창호는 띠살창으로 짜 어간은 4분합, 협간은 2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다. 안에는 수기삼존상과 나한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각각 기둥의 주련은 다음과 같다. 住世恒爲眞福田 親承布師口丁口寧囑 三明六通悉具足 四向四果早圓成
<능가사 뒤에서 본 모습> <능가사 대웅전 (보물 제1307호)의 모습>
<능가사>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나라에 있는 명산을 능가사(楞伽寺)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능가(楞伽)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능가사의 정문에 들어서면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거장이 조각했다는 사천왕의 목각이 웅대하게 안치되어 있으며, 약 1500여 년 전 아도화상이란 중이 창건했다는 절인데 이때에 팔영산 중복에 자리 잡아 그 이름을 보현사라고도 하였다. 그 후 정현대사가 약 10년 동안에 20여개의 전당을 중건하고 능가사라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인 420년(눌지왕 4)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했다고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아 아도가 과연 이 절의 창건자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능가사대웅전(보물 1307)과 천왕문(天王門),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한 불상 22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범종(梵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능가사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 70)가 있다. 이 중 사적비는 300여 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우수한 작품이다. 특히 능가사 범종은 1698년(숙종 24)에 주조된 것으로 이 종을 치면 인근 점암면 일대에 울려 퍼질 정도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탐을 내 헌병대까지 끌고 가 종을 쳐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조(廣照), 사영당(泗影堂), 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능가사 대웅전 공포> <능가사 대웅전 용포>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류큐[琉球]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 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사불암(四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 때 10대 사찰로 꼽혔다는 능가사는 현재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능가사에는 천왕문 목조사천황상이 있다. 사천왕상은 월래 인도 재래의 방위신인데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대략 6세기말이나 7세기 초로 보고 있다. 감은사지 사적기에 사천왕상이 조각된 것을 보면 7세기말에 사천왕상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8세기가 되면 사천왕상은 인왕상과 함께 만들어지다가 9세기 이후부터는 주로 석탑이나 부도의 기단부에 활발하게 조각된다. 1995년 천왕문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초창 연대는 조선 현종7년(1666)이며, 중창은 조선 순조 24년(1824), 3창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으로 세 번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뒷받침 해주는 자료로 조선 숙종 16년(1690)에 세운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초창 연대가 1666년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천왕문>
사천왕상 1 칼을 들고 있으시니 새 녘[東方]을 지켜주시면서 이 땅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지국천왕님 사천왕상 2 창과 탑을 들고 계시니 갈 녘[西方]을 지켜주시면서 온갖 유정과 무정을 큰 눈으로 살피시는 광목천왕님 사천왕상 3 미리와 여의주를 들고 있는 계시니 앞녘을 지켜주시면서 불자들의 몸과 맘을 날로 키워주시는 증장천왕님 사천왕상 4
비파를 들고 계시니 윗녘을 지켜주시면서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다문천왕님
<사천왕문을 통하여 멀리 보이는 대웅전 모습>
능가사 부도 능가사 경외 400m지점에 추계당부도와 함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오래지 않으나 기단부의 동물(용)조식이나 8각하대석의 화문등, 특이한 옥개석 형태를 하고 있다. 자연석 돌을 쌓아 30~50㎝ 높이로 담장(230× 185㎝)울 둘러 부도의 구역을 설정하고 있다. 하부가 전부 드러나지 않아 지대석유무는 확인할 수 없고 복연대좌를 마련하였다. 8엽의 복연이 있는 이 대좌는 동일석으로 네 귀면에 용두를 조식하여 밖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 용두는 각각 그 조각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복련 위로 8각의 하대석을 올렸는데 8면에 각각 화문이 조식되었는데 그 문양이 전부 다르다. 고복형의 탑신은 별다른 조식이 없으며 전면 중앙에 사영당(泗影堂)이란 탑호를 음각해 두어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4각의 옥개석은 하면은 수평이며 별다른 조식이 없다. 약간 반전을 보이며 상면은 연주형 문양으로 장식하였고 우진각형태의 지붕을 연상케 한다. 상면은 연꽃잎이 말아져 올라가는 듯 한 조식을 추가했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1석으로 노반대신 복연을 조식하고 그 위로 연주문을 돌린 뒤 보주로 마감했다. 조성연대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능가사 사적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1978. 9. 22에 지정된 이 사적비는 능가사 경내의 대웅전에서 뒤편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바로 앞에 응진당이 있다.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형의 비이다. 이 비는 비신 전면 상단에 전서체의 횡서로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 쓰고 비명은 「朝鮮國全羅道興陽縣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幷序」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 63자인데 행서체로 홍문관부제학 오수채가 짓고 사헌부대사헌 조명교(1687~1753)가 전서와 함께 비문도 썼다.
<능가사 표지석>
<청명한 날 능가사와 팔영산의 아름다운 모습>
<팔영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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