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방

조선의 개국과 백제의 역사가 서린 계룡산 남부능선 종주

한림정(신방현) 2008. 12. 15. 11:55

조선의 개국과 백제의 역사가 서린 계룡산 남부능선 종주

 조선의 개국과 백제의 역사가 서린 계룡산 남부능선


날씨 : 쾌청 기온 : 섭씨 영하5도~영상5도

산행거리 : 15km  산행시간 : 6시간 30분

 


<산행경로>

계룡시 엄사중

07 : 30

윗산명재

11 : 13

금남정맥 들머리

07 : 42

아랫산명재

11 : 36

일출

07 : 44

366.2봉

11 : 51

무상사 갈림길

08 : 44

함지봉(386.5m)

12 : 29

맨재

09 : 00

황산성

13 : 07

향적산 정상(574.9m)

09 : 37

우물

13 : 25

농바위(상여바위)

09 : 58

주차장

13 : 30

점심

10 : 20

연산 고수부지

14 : 00


<인간의 삶>


인간의 삶은 ‘갈등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즉, 갈등의 바다라는 두 엔진을 장치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배를 건조하고,

해도를 그리고,

나침반을 만들어

어떤 목표들을 향해 간다.


- 박용헌의 ‘한국인 그 얼과 기상’에서 -


 

 <엄사중학교 앞에서 산행 시작>

 <금남정맥 들머리>

 

 <계룡시 일출>

 <일출에 물든 계룡산>

 <일출에 색깔을 바꾼 국사봉 향적산>

 

 

 

 

<조선의 옛 도읍지에서 군사도시로 웅비하는 신도안 계룡시>


 유성을 지나 삽재를 넘으며 산꾼들을 태운 버스는 계룡산 터널을 지나 양정고개로 달린다. 금남정맥의 길목인 양정고개를 지나 발전하는 계룡시의 아파트를 지나 엄사중학교 앞에 버스를 세운다.

 조선 태조가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제의를 받아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신도안. 예전의 아름답고 토속적 신앙이 만발했던 추억은 사라지고 도시의 살아 숨 쉬는 정취가 금남정맥 들머리에 가득하다.

 계룡산 남부능선은 동학사가 전부인양 알려진 계룡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코스이다. 실제는 관음봉과 쌀개봉 그리l고 계룡산 상봉을 연결하는 금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향적산 국사봉과 연산을 잇는 능선을 일컫는다.

 태조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바뀌도록 한 왕사 무학은 풍수지리에 안성맞춤인 계룡산 남쪽 신도안을 도읍지로 지목하고 기초를 다진다. 문다래미, 머리봉 그리고 국사봉 향적산은 그의 체취가 묻어있는 지명들이다.

 비록 하륜이 지역적 협소함과 교통 불편을 이유로 현재의 서울로 도읍지를 결정하게 되었지만 조선 500년의 터전으로 각광받았음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솔밭 길을 여명에 걷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데 일출을 맞는 기쁨이 같이 한다면 이보다 더한 여명은 없으리라. 신도시 계룡시를 바라보며 맞는 일출에 굉장한 서기와 기운을 느낀다.

 육해공군 본부가 웅지를 튼 계룡시는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병풍처럼 둘러 처진 계룡산 자락의 산줄기는 북쪽의 바람을 막고 안락한 형국의 지세를 뽐낸다.

 남쪽으로 내달린 능선과 계룡산 그리고 대전시계를 잇는 산줄기는 신도안 계룡시를 든든하게 품고 있다. 국가 방비 주축인 3군 본부는 우리 군의 핵심으로 나라 지킴의 근간이다.

 계룡산 상봉과 넓게 펼쳐진 분지형 신도안을 바라볼 수 있는 맨재의 조망은 천하일품이다. 청명한 날씨와 아침 서기는 겹겹이 다가서는 산 그리매의 장관 속에 서대산, 대둔산, 보문산, 고리산, 식장산, 멀리 덕유산과 속리산, 운장산까지 뻗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금남정맥 길에 본 계룡산>

 

 <맨재에서 본 계룡산 남부능선>

 <산그리매 정경>

 <계룡 3군 본부>

 <노성뜰>

 <국사보에서 본 남부능선 계룡산쪽>

 <서대산 방향 원경>

 <대둔산 방향 원경>

 <남부능선 연산쪽 산줄기>

 <대전 시가지쪽 정경>

 <국사봉  비석>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의 국사봉 향적산>


 국사봉 향적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너무도 아름답다. 날씨는 춥고 바람이 있지만 덕분에 주변 조망은 너무도 선명하다.

 계룡산의 모습이 바로 앞에 우뚝하고, 금남정맥 산줄기 따라 대전과 금산 지역이 산들이 줄줄이 다가온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아침 서기에 겹겹이 절경을 이룬 우리 산하를 바라본다.


 계룡시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향적산 국사봉 소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향적산(香積山, 해발574m)은 풍수상으로 계룡산에서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계룡산 주봉인 상봉(근래 계룡산을 천황봉에서 상봉으로 고쳐 부른다)에서 동쪽으로는 암용추, 서쪽으로는 신원사, 남쪽으로는 숫용추를 남기고 계속 남으로 달려 두마면 향한리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향적산 국사봉이다.

 산정에는 중계탑이 있지만 조망은 매우 좋다. 북으로는 맨재 능선의 513고지를 거쳐 계룡산 상봉으로 이어지는 계룡산의 웅장한 산세와 다시 왼쪽으로 연천봉, 오른쪽으로 황적봉, 치개봉, 밀목재, 관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서쪽의 논산시 상월면·공주시 계룡면 들판, 남쪽으로는 국사봉과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격전지 황산벌이 어림되고, 동쪽 가까이로는 계룡시 두마면과 신도안이 내려다보이며 멀리 대전시가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정감록(鄭鑑錄)에서는 '신도(新都)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朝野)가 넓고 백성을 다스림에 모두 순하여 8백년 도읍의 땅이다'라고 예언했다. 약 600여 년 전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땅이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과 공주시 계룡면지역은 계룡산과 향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사이에 두고 신도안(新都內)과 등을 맞대고 있다. 신도안은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을 답사한 후 새 도읍지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데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정씨를 가진 왕조가 집권하면 좋을 땅’이라는 도참설과 뱃길, 교통이 불편해 도읍으로 부적합하고 물이 부족하다는 무학 대사의 말에 따라 결국 한양에 도읍를 정했다고 한다. 근래에도 이 부근이 신행정수도 후보지에 오른 것을 보면 ‘명당’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산정에는 1948년에 세웠다는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오행비(五行碑-국사봉 정상에 오(五), 화(火), 취(聚), 일(一)의 네 글자가 음각된 비)"가 서 있고, 지금도 무속인들의 기도터로 이용된다.

 이곳에서 매일 기도하던 조씨 할머니께서 묘향산과 구월산에 산재하던 단군의 넋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신격화하면서 기도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정확히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는 목적으로 탑을 세웠는데 그 비(碑)안에는 "우리나라가 1000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깊은 뜻을 담았다"고 한다. 

 동쪽에는『天鷄黃地』 서쪽에는『佛』 남쪽에는『南斗六星』 북쪽에는『北斗七星』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다. (참고 ☞ 계룡시 홈페이지)

 비석의 유래는 이길구씨의 저서 "계룡 산맥은 있다."에 기술되어 있다.


 

 

 <농바위(상여바위)>

 <대둔산쪽 아침 정경>

 <농바위에서 본 향적산>

 <농바위에서 본 남부능선 연산쪽 산줄기>

 <윗산명재> 

 <아랫산명재>

 

 <366.2봉 삼각점>

 <계룡산 남부능선>

 <함지봉 정상>

 <논산 평야>

 <상월쪽 평야>

 <줌으로 당긴 대둔산>

 

 

<농바위를 지나 백제의 혼을 찾아 달리는 황산성 가는 산길>


 국사봉이 조선 도읍지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면 농바위를 지나 황산성으로 내달린 산줄기는 백제의 비운이 서려 있다. 농바위는 상여바위라고도 하는데 그 형상에서 유래되었으며, 능선에서 드물게 있는 바위군이다. 오르기는 좀 까다롭지만 막상 오르고 나면 천하를 얻은 듯 그 나릇한 쾌감이 그만이다. 멀리 연산을 바라보는 산줄기 비경과 지척의 금남정맥 그리고 국사봉 늠름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윗산명재와 아랫산명재는 논산시 상월면과 두마면을 넘나드는 중요한 고개이며, 긴 남부능선 줄기에서 유일한 고갯길이다.

 지도상에는 주산에도 황산성이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성의 자취는 발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산길이 참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지역이 많아 무수한 낙엽이 지나는 나그네를 반긴다.

 그나마 함지봉 오르기가 힘에 부치는데 육산의 푸근함에 피로도 잊는다. 깃대봉을 지나 황산성 봉우리에 오르니 논산벌이 한눈에 장관을 이룬다.

 논산 시가지와 멀리 탑정리 저수지 그리고 상월지역 평야지대가 광활함을 느끼게 한다.

 성곽은 많이 허물어지고 황폐화 되었지만 정상 부근과 우물 근처에는 온전한 형태로 성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에는 허물어진 성곽 돌들이 약 5미터 정도의 폭으로 흩어져 있는데 성안에는 의외로 집터와 농사짓던 흔적들이 많이 있다.

 특히 상당히 큰 우물이 있는데 그 수량이 대단하여 지금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나는 노파의 말에 의하면 여인들이 앞치마로 성곽 돌들을 날랐다고 한다.

 

 <황산성>

 

 <깃대봉>

 <시루봉>

   

 <무너진 황산성>

 <황산성>

 <황산성 내 거주지>

 <황산성 우물>

 

 

 문화재청에서 소개한 황산성(黃山城) 관련 글이다.

 황산성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백제의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 산봉우리를 둘러쌓은 석성(石城)이다. 북쪽은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형 조건을 이용하여 자연석으로 축성하였고, 나머지 지역에는 활석(滑石)을 사용 등고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며, 깬 돌을 이용하여 모가 난 쪽이 겉으로 나오도록 하였다.

 북서쪽의 노성산성과 일직선상에 있어서 신라군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 안에 우물 1곳과 군량을 보관하던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군창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성은 무너진 상태이며, 동서남북 문의 흔적이 있고, 성의 북쪽 봉우리에는 30㎡의 넓은 대지가 있는데 장수가 올라가 지휘하던 장대 터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 황산인방(黃山寅方), 대안(大安)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 고려시대 와편(瓦片), 자기편(磁器片)과 조선시대 백자편(白磁片)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城)은 여러 시대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고양리 마을>

 <연산천 갈대 숲>

 

 

 

 

 

 

 

 노성면에 있는 노성산성과 함께 신라군들의 침입을 막는 사비성 방어형 성으로 추정되며, 근처에는 화랑 관창과 계백장군과의 결투로 유명한 황산벌이 있다.

 길지 않은 산줄기를 부지런히 걸은 산꾼들은 풍요로운 논산들과 주변 산들을 바라보며 한없는 포만감을 느낀다. 태조 이성계가 신하들과 모여 도읍지를 논의하던 국사봉과 백제의 비운이 서린 황산성을 지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특히 근처 개태사를 방문하며 느꼈던 견훤과 왕건의 일화는 이곳이 국가의 국운과 큰 연관이 있는 지역임을 인식하게 된다.

 연산은 근래 대추와 순대 그리고 곶감으로 유명하다. 또한 근처에는 중소기업들이 많이 들어서고, 금강대학이 있는 상월에는 국방대학도 내려올 예정이라 한다.

 지리적 풍요로움을 간직한 연산지역은 조상의 숨결이 가득한 안락한 고장이다. 긴 남부능선의 끝자락에서 계룡산의 기운을 치솟게 하는 무언가를 간직하게 한다.

 연산 고수부지 근처에서의 뜨거운 어묵 뒤풀이와 연산 순대 맛보기는 오늘 산행의 푸근한 마무리였다.

 계룡산의 동서남북을 두루 살펴본 산행이 이 지역 산행 길라잡이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개태사 입구>

 <금남정맥>

 <개태사에서 본 계룡산 남부능선>

 <개태사 오층석탑>

 

 <개태사> 

 <개태사 대웅전>

 <개태사 철확>

 

 

 

 

 

 

 <개태사>

 <개태사와 금남정맥>

 

 

<계룡산 남부능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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