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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붕

한림정(신방현) 2025. 4. 15. 12:43

지붕마루

지붕면이 서로 만나는 부분에서는 지붕마루를 구성해서 마감

지붕마루는 위치에 따라 세분되는데 종도리 위에 도로방향으로 길게 만들어지는 것 용마루

팔작지붕에서 합각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내림마루

추녀위 지붕마루는 추녀마루

 

지붕마루를 만들 때 제일 아랫단에는 수키와와 암키와에 의해 만들어지는 요철에 맞는 삼각핀 모양의

특수기와가 놓이는데 이를 착고라고 함.

머거불 위에는 암막새를 엎어 놓은것과 같은 드림새가 있는데 장식기와를 사용했는데 이를 망와

망와는 일반 암막새에 비해 드림새가 높다.

용마루에서 착고 위에 수키와를 옆으로 눕혀 한단 더 올리는데 이를 부고라고 함.

부고 위에는 암키와를 뒤집어 여러 장 겹쳐 쌓는데 이를 적새라고 함.

암키와 맨위에는 수키와를 한단 놓는데 이를 숫마루장이라고 함.

지붕마루 양쪽 끝에서는 착고와 부고의 마구리쪽에 수키와 두장을 옆으로 눕혀 막아주는데 이를

머거불이라고 함.

잡상 : 1622년경에 지어진 어유야담에는 잡상을 십신이라고 하여 이름이 순서별로 있음

1920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와도에는 잡상그림의 명칭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이름이 등장함.

잡상은 과거에는 궁궐등 격이 높은 건물에 설치하였음.

잡설 잡상(雜像), 삼장법사는 왜 지붕위로 올라갔나?

궁궐 장식중 관람객이 호기심을 많이 갖는 하나는 지붕 위 잡상(雜像)입니다.

잡상을 떠올리면 흔히 <삼장법사와 그 일당>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의 꿈이야기에서, 서유기의 인물들까지 이야기가 늘어집니다.

동경(銅鏡)이나 다른 자료에 의해서 고려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 확인됩니다.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으로 이어지는 이름인지는 의문이 많이 드는 상황.

우선 대당사부로 시작되는 잡상의 종류에 관한 내용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대궐 문루 위의 십신(十神)으로 등장합니다. 근대의 기록인 도교계열의 상와도에는 잡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계적으로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창덕궁 수리 도감 같은 공식 기록엔 잡상(雜像)이라 표현하지만, 대당사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수리도감에는 손행자, 손행자매, 준견, 준구 등으로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잡상의 종류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잡상은 조선과는 좀 다른 형태입니다.

그들은 맨 앞에 선인(仙人)이라 부르는 신선이 봉황을 타고 앉아있고,

그 뒤를 주수(走獸-뒤를 따르는 동물)라 불리는 서수들이 등장합니다.

, 자금성에는 봉황을 탄 선인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용, , 사자, 해마, 천마 등등 상상의 서수들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잡스러운 잡상이라기보다는 귀한 분들의 귀상(貴像)이라고나 할까요?

황제가 있는 궁궐의 위엄과 벽사를 위한 상징으로, 선인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현장(삼장)법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 궁궐의 잡상은 말 그대로 잡스러운 모습입니다.

특히 대당사부라 명명해놓은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사람(삼장법사)의 모습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두상이나 갑옷도 어울리지 않고,

특히 발을 보면 사람의 발이라기보단 짐승의 발에 가깝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대당사부(삼장법사)의 모습일까요?

뒤를 따르는 형상들도 귀인이나 서수라기보단 말 그대로 잡스러운 토기, 특히 신라 토기에서 보는 것 같은 거칠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굳이 중국을 모방 안 한다 하더라도 궁궐이라는 위엄과 격식의 공간을 생각해보면 저런 모습의 잡상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만약 대당사부가 맞는다면 그래도 유교 국가의 궁궐 지붕 위에, 특히 불교의 스님()을 올려놓는다는 것도 좀 어색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삼장법사와 서유기 유의 이야기보단 벽사와 장식의 의미가 있는 형상으로만 해설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중국과 조선의 차이는 중국은 말 그대로 지붕을 보호하는 추녀마루의 장식기와의 하나이며 기와가 밀려 내려오지 않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추녀마루를 삼화토로 양생한 곳에 부착해놓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지붕 위 장식에 대한 차이가 양국 간에 존재하고 있는데, 무엇이 맞고 안 맞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지붕 장식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청기와 역시, 잠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발굴자료나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까지는 청기와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의 청기와만 눈에 띄지만, 조선 전기엔 근정전 등 여러 곳에 청기와가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청기와는 염초의 생산과 공급, 제조방식 등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노하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임진란을 겪으면서 청기와 제조에 관한 상당한 기술들이 끊기게 됩니다. 광해군 초기 인경궁의 여러 전각이 청기와로 적용되었고, 인조반정 등으로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인경궁의 청기와가 창덕궁이나 창경궁으로 이전된 기록들이 나옵니다. 물론 그 이후 화재로 다 사라지고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만 남아있습니다.

 

청기와 적용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는 기술이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후기에 청기와는 불과 수년 만에 탈색, 변색이 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해결에 대해 광해군과 관리들의 논의가 상당히 등장합니다. 또 하나는 지붕 위의 잡상 들도 청기와로 구웠다는 겁니다. 청기와로 만들었다면 현재의 모습보다는 중국의 자금성의 모습(황와)같은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삼화토로 양생을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탈색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기술이전에 관한 논쟁이 등장합니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서 등장한 말이 있습니다. 즉 도제의 장인과 제자들처럼 기술이전을 잘 해야 했는데, 청기와의 경우 우린 임란의 과정을 통해 이것이 끊어졌습니다. 이를 견주어 뒷사람들에게 기술과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이런 청와장(靑瓦匠) 같은 놈아하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

* 사족, 어처구니는 공식적으로 맷돌의 손잡이나 잡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삼장은 왜 저리로 올라간 것일까요?

잡설 잡상(雜像), 삼장법사는 왜 지붕위로 올라갔나?

궁궐 장식중 관람객이 호기심을 많이 갖는 하나는 지붕 위 잡상(雜像)입니다.

잡상을 떠올리면 흔히 <삼장법사와 그 일당>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의 꿈이야기에서, 서유기의 인물들까지 이야기가 늘어집니다.

지붕 위에 잡상이 적용된 예는 건축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동경(銅鏡)이나 다른 자료에 의해서 고려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 확인됩니다. 다만 그 내용이 최근 해설하는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으로 이어지는 이름인지는 의문이 드는 상황입니다.

우선 대당사부로 시작되는 잡상의 종류에 관한 내용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대궐 문루 위의 십신(十神)으로 등장합니다. 근대의 기록인 도교계열의 상와도에는 잡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계적으로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창덕궁 수리 도감 같은 공식 기록엔 잡상(雜像)이라 표현하지만, 대당사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수리도감에는 손행자, 손행자매, 준견, 준구 등으로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잡상의 종류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잡상은 조선과는 좀 다른 형태입니다.

그들은 맨 앞에 선인(仙人)이라 부르는 신선이 봉황을 타고 앉아있고,

그 뒤를 주수(走獸-뒤를 따르는 동물)라 불리는 서수들이 등장합니다.

, 자금성에는 봉황을 탄 선인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용, , 사자, 해마, 천마 등등 상상의 서수들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잡스러운 잡상이라기보다는 귀한 분들의 귀상(貴像)이라고나 할까요?

황제가 있는 궁궐의 위엄과 벽사를 위한 상징으로,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인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현장(삼장)법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 궁궐의 잡상은 말 그대로 잡스러운 모습입니다.

특히 대당사부라 명명해놓은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사람(삼장법사)의 모습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두상이나 갑옷도 어울리지 않고, 특히 발을 보면 사람의 발이라기보단 짐승의 발에 가깝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대당사부(삼장법사)의 모습일까요? 큰 의문이 듭니다.

뒤를 따르는 형상들도 귀인이나 서수라기보단 말 그대로 잡스러운 토기, 특히 신라 토기에서 보는 것 같은 거칠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굳이 중국을 모방 안 한다 하더라도 궁궐이라는 위엄과 격식의 공간을 생각해보면 저런 모습의 잡상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만약 대당사부가 맞는다면 그래도 유교 국가의 궁궐 지붕 위에, 특히 불교의 스님()을 올려놓는다는 것도 좀 어색합니다.

사실 삼장법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만, 그래도 이런 디테일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큰 의미의 그림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자료를 보다 보니 청기와 역시 발굴자료나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까지는 청기와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의 청기와만 눈에 띄지만, 조선 전기엔 근정전 등 여러 곳에 청기와가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청기와는 염초의 생산과 공급, 제조방식 등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노하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임진란을 겪으면서 청기와 제조에 관한 상당한 기술들이 끊기게 됩니다. 광해군 초기 인경궁의 여러 전각이 청기와로 적용되었고, 인조반정 등으로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인경궁의 청기와가 창덕궁이나 창경궁으로 이전된 기록들이 나옵니다. 물론 그 이후 화재로 다 사라지고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만 남아있습니다.

청기와 적용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하나는 기술이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후기에 청기와는 불과 수년 만에 탈색, 변색이 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해결에 대해 광해군과 관리들의 논의가 상당히 등장합니다.

또 하나는 지붕 위의 잡상 들도 청기와로 구웠다는 겁니다. 청기와로 만들었다면 현재의 모습보다는 중국의 자금성의 모습(황와)같은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삼화토로 양생을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탈색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기술이전에 관한 논쟁이 등장합니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서 등장한 말이 있습니다. 즉 도제의 장인과 제자들처럼 기술이전을 잘 해야 했는데, 청기와의 경우 우린 임란의 과정을 통해 이것이 끊어졌습니다. 이를 견주어 뒷사람들에게 기술과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이런 청와장(靑瓦匠) 같은 놈아하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

제가 어릴 때는 공부 깍쟁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혼자만 알고 다른 친구들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는 친구들을 공부 깍쟁이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비하된 청와장 같은 것이었을까요?

어쨌거나 누가 이런 글을 읽던지 말든지, 꾸준히 뭔가를 나누고 뿌려대는 저도 적어도 <청와장>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 면에서 공부해서 남 주자는 궁궐지킴이들도 청와장의 경지는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나라의 현실에 답답해 올려다본 지붕 위엔, 여전히 대당사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당사부든 삼장이든 먼가를 잘 지켜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사족, 어처구니는 공식적으로 맷돌의 손잡이나 잡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삼장은 왜 저리로 올라간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