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곡(龍山九曲)은 '계룡산 상신계곡'에 있다.
한 은사(隱士)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용(龍)이 승천하는 이야기형식을 빌어 아홉군데 바위에 새겼다.
그 은사는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 선생(1856~1936)이고, 간절한 소망은 '조국의 광복'이다.
구한말 벼슬생활을 했던 취음 선생은 회갑을 맞은 1916년 봄, 망국의 한을 품고 상신계곡에 은거하며 비분(悲憤)을 삭혔다.
돌아가시기 4년전인 1932년 8월에 아드님의 도움을 받아 그 한(恨)을, 그 비분을 바위에 아로새겼다.
그것이 용산구곡(龍山九曲)으로 이 세상에 남겨졌다.
☞취음 선생의 친형은 권중현이다. 바로 을사오적(乙巳五敵)의 한 사람이다. 당시 농상부대신이었다.
취음선생은 형과 의절(義絶)했다. 한 배에서 나왔어도 인생관과 가치관이 너무도 달랐던 모양이다.
나머지 을사오적은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이었다.
우리는 그 이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다시한번 거명한 것이다.
☞취음 선생이 45세에 득남해 얻은 아드님이 봉우(鳳宇) 권태훈 선생(1900~1994)이다.
봉우 선생은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대가로, 민족운동가이자 단군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1984년에 선풍을 일으켰던 소설 '단(丹)'의 실제 주인공이다. 그 제자들이 '봉우사상연구소'를 설립해 전국에서 활동중이다.
☞ 용산구곡은 한 사람의 바람을 표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후대에 그 의미를 되새기도록 전해줘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용산구곡은 구곡의 설정 주제를 용으로 삼은 점이 특징이다.
용이 숨어있다가 승천할 때까지 이야기 전개를 통해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인의 국권회복 의지와 염원을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해 수도하던 용이 비로소 때를 만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함을
조국이 독립하고 번영하는 것으로 상징화시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1곡은 용을 찾는 문인 심룡문(尋龍門),
2곡은 용이 숨어 있는 못인 은룡담(隱龍潭),
3곡은 용이 수련하는 곳인 와룡강(臥龍岡),
4곡은 용이 수련하다 쉬면서 노니는 곳인 유룡대(遊龍臺),
5곡은 용이 공부가 무르익어 여의주를 얻는 바위인 황룡암(黃龍岩),
6곡은 용이 세상 이치를 보는 능력을 얻어 모습을 나타내는 현룡소(見龍沼),
7곡은 용이 구름을 만나 하늘로 오를 준비를 하는 못인 운룡택(雲龍澤),
8곡은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곳인 비룡추(飛龍湫),
9곡은 용이 승천해 신이 된 못인 신룡연(神龍淵)으로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했다.
☞용산구곡이 우리들한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계룡산자락 한 능선 넘어 갑사계곡에 '갑사구곡'이 자리하고 있기때문이다.
갑사구곡을 남긴 이가 취음 선생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표적 친일파의 한 사람인 간옹 윤덕영(1873~1940)이다.
그는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조선이 국권강탈을 당할때 순종에게 옥새날인을 강요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적지않은 포상금을 받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다.
윤덕영은 갑사계곡에 '간성장(艮成莊)'이란 별장을 지어놓고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갑사구곡'을 남겼다.
☞같은 시대에 한 사람은 우국충정의 길을 걸으며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인내했고, 또 한사람은 매국의 길을 걸으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역사의 심판은 참으로 냉엄하다. 후세 사람들은 과거의 사실을 머리속에 각인하고 영원히 기억해나갈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되는냐'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인생의 화두가 되는 것은 후세 역사가 두렵기때문이다.
☞참고로 용산구곡은 '느낌표'님이 우연히 용산구곡의 존재를 알게 돼 상신계곡을 샅샅이 훑어 그 위치를 일일이 찾아냈고,
한학에 조예가 깊은 '가을하늘'님이 해설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