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방

지리산 천년송과 도솔암을 찾아서

한림정(신방현) 2009. 8. 21. 09:44

지리산 천년송과 도솔암을 찾아서

 

2009.8.16(일) 날씨 : 맑음 

산행거리 : 16km  산행시간 : 7시간 

<산행 경로>

반선교

08 : 26

도솔암 

갈림길(전망대)

13 : 34

와운마을

09 : 05

천년송

09 : 13

도솔암

14 : 15

바위조망대

10 : 51

영원사길

14 : 55

영원령(1292m)

11 : 20

양정마을 입구계곡

15 : 22

헬기장 근처(점심)

12 : 30

삼정주차장

16 : 00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나아가는 것, 또 하나는 물러서는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이 순간에 구분된다.

어디로도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자신을 세워라.

그것은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과 기회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여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벼랑 끝에서 나를 단련하라.


- 우장홍의《어머니의 편지》중에서 -

 

 <반선교를 지나는  산꾼들>

 

 반선과 뱀사골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지리산에 큰 절이 하나 있었는데 보름달이 뜨면 그 절의 주지스님이 산으로 올라  갔다고 한다.

 이를 궁금히 여기시던 큰 스님 한 분이 주지 스님의 뒤를 쫒아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쫒아간 그곳에 주지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큰 스님은 보름달이 뜨기 전 주지스님의 옷에 비상을 달아 놓았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자 주지스님은 후에 뱀사골이 된 계곡으로 여느 때처럼 올라갔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산에 오른 후 한참이 지나서 어마어마하게 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후에 그 곳에 가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뱀사골‘이라고 한 것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죽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 되었고, '반선'이라 함은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한다고 한다.

 

 

 <뱀사골>

 

 <뱀사골 야영장>

 

 <와운 마을로 가는 지리산 옛길>

 

 

 구름도 누워 쉬어 간다는 와운 마을은 건물은 많고 다양하지만 가구 수는 겨우 10여 집에 불과하다. 하지만 요즘은 펜션과 민박집이 성업 중이고 차량 출입도 상당하다. 

 와운마을에 사시는 정민석 할아버지가 전하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정 할아버지는 여수·순천사건 이야기를 하신다.

 “마을 전체가 그때 소개(疏開) 당했어요. 아마 이 인근에선 와운이 첫 번째일거라. 아홉사리를 넘어온 군인들이 이 마을로 들어왔거든. 총 무서운 줄 모르던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그나마 우리 가족은 일제 때 총의 위력을 보았던 아버지 덕분에 살았거든. 솜이불을 덮고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거나 나락 가마니를 쟁여서 그 뒤에 숨기도 했어요. 낮에는 군인, 밤에는 인민군 천지였지. 사상이 뭔지도 모르던 순진한 산골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군인들에 의해 몰살당한 일도 많아. 세 살 먹은 어린애부터 여든이 넘은 노인네까지 가리질 않았어.”

 실제로 최근까지 뱀사골 곳곳엔 뼈가 ‘버글버글’ 했단다. 언젠가 바위 밑에서 나란히 죽어 누운 다섯 구의 시체를 발견한 적도 있다. 악몽 같은 고통은 여수·순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 작은 산골마을을 몹시도 괴롭혔다.  

 정 할아버지는 아직도 ‘딱꿍총’을 기억한다. 여기서 ‘딱’하고 쏘면 저기로 총알이 ‘꿍’하고 날아갔다는 인민군의 무기다. 남원으로 쫓겨나간 주민들은 군인이 와운골을 수복한 후에야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공부는 고사하고 일만 하던 시절, 보리타작을 할 때면 찬물에 간장을 섞어 마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당시 장골의 하루 일당이 쌀 한 되였지만 그것도 형편이 좋을 때였지, 닷새 반을 일하고 겨우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아온 궁색한 살림이었다.

 자유당 말기 때는 뱀사골 곳곳에 목재 사업이 번창했다. 명목은 후생사업이었지만 실상은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벌목을 수시로 해댔으며 그 나무들은 철도 침목이나 숯 굽는 용도로 쓰였다. 한때는 60여가구가 살았고 초등학교 분교까지 들어설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4대째 와운에 살고 있지만 5남 1녀인 자녀 교육을 위해 꼬박 30년간 남원시내에서 살았다. 자녀들 모두 장성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혹여 도시에서의 오랜 세월로 돌아온 고향 살림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할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하다.“좋지!” 젊은 시절 아픔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지만 그래도 결국 뼈를 묻을 곳, 마음이 가장 푸근한 곳은 어김없이 고향 차지가 된다.


 

 

 <와운 마을 입구 당산목>

 

 

 <와운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심마니 능선>

 

 <마을 입구에서도 잘 보이는 천년송>

 

 

 <가을을 알리는 해바라기와 심마니능선의 배경이 아름답다>

 

 <와운 마을 민박집 안내의 앙증스러운 미>

 

 

 <천년송:천연기념물 424호>

 

 

 이 소나무는 할머니 소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예로부터 20m남짓 떨어진 곳에 할아버지 소나무가 있다. 할머니 소나무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며, 가슴높이 둘레는 6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2m 가량에 달한다. 소나무 앞쪽에는 구름도 누워서 지나간다는 와운 마을이 있다. 와운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수호신으로 믿고서 매년 정월 초사흘에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뱀사골 상류 명선봉에서 뻗어 나온 산자락에 자리한 이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에서 장엄한 기품을 풍긴다. 두터운 용 비닐 모양의 나무껍질이 오랜 세월의 연륜을 말해 주는 듯하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때부터 자생해 왔다고 알려져 왔으며, 20m 간격을 두고 한아시(할아버지)송과 할매(할머니)송이 이웃하고 있다. 이중 더 크고 오래된 할매송을 마을 주민들은 천년송이라 불러오며 당산제를 지내왔다.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한 반송으로 수형이 아름다우며 애틋한 전설을 가진 유서 깊은 노거목으로 희귀성과 민속적 가치가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은 약 7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와운마을 주민들은 천년송을 매우 신성시 여겨 수호신으로 믿고 마을이 생긴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어쩌다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 해에는 마을의 주 소득원인 감나무 등 과일나무에 과실이 열리지 않는가 하면 마을에 이변이 발생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나무이다.

 

 천년송 전설에 따르면 단지 천년송에 빈다 하여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년송에 평생 한 가지 소원을 말하면 천년송이 꿈속에 호랑이를 보내어 소원 성취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일러 주는데 반드시 이를 실천해야만 한다.

 이는 '나 보다 더 곤궁한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도 큰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천년송을 찾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평생 소원을 빌고 한편으로 더 낮은 곳을 향하는 사랑의 마음을 되새겨야 하며,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겸손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와운마을 민가>

 

 <천년송과 심마니 능선의 조화>

 

 <한아시송>

 

 <한아시송이 수려한 할매송을 바라본다>

 

 <독버섯-독이 있음에 아름답다?>

 

 <바위 전망대>

 

 <멀리 와운마을이 보인다>

 

 <천년송 능선> 

 

 <조망바위에서 와운마을을 바라보는 산꾼의 실루엣>

 

 <해발 1292m의 영원령-천년송능선과 중북부능선 갈라진다>

 

 <와운능선-아래로는 와운계곡이 수려하다>

 

 <도솔암-너무도 조용하고 지리의 품을 느낀다>

 

누군가 삶에 지치거든,

어디론가 떠나고 싶거든,

이곳 도솔암으로 오라고 싶다.

 

 지리산 3대 명당 중에 하나라는 이곳 도솔암! 

 국화꽃과 본당사이에는 주춧돌만 있고

 탑이 없는 부도탑 자리가 있고

 그 앞엔 이렇게 적힌 기와 한 장이 놓여 있다.

 

 " 살으리 / 살으리 / 살으리랏다 / 청산에 살으리랏다 /

                                          멜에랑 / 달에랑 먹고 / 청산에 / 살으리랏다 " 

 

 주춧돌 둘레의 잔디는 원을 그리며 닳아 없어진 모습이다.

 도솔암에는 탑이 없다.

 아니 오늘은 스님도 계시지 않는다.

 홀로 지리산 자락에 운무에 싸여 산정을 지키지만 정한수 한 방울마다에 부처님의 마음이 허허롭다.

 스님은 지리산을 앞마당으로 삼고 계셨기에 천왕봉이 탑이고 반야봉이 탑이다.   

 무심의 탑, 무형의 탑이 운치로 다가온다.

 너무도 무가치한 항아리에 연꽃이 앙증스럽다.

 그저 이 높은 산자락 지리산 암자에 부처님의 미소로 활짝 피어 곱다.  

 

 

 

 

 

 

 

도솔암의 수행처인 삼소굴 (三笑窟)의  모습이 수수하고 단초로우며 아름답다. 

정말 토굴다운 어두움과 명성을 간직한 고승들의 수행처다.

이름도 삼소굴이다.

경봉선사가 통도사 극락암에서 30년 동안 주석 하시며 찾아오는 사람에게

선다일미(禪茶一味)를 실천하셨던 그곳의 이름 그대로이다.

 

정치나 인생을 실패한 또는 큰 뜻을 품는 대인들이 줄줄이 찾았다는 이곳.

그들은 여기서 무슨 결심을 하고 속세로 나갔을까!

 

 

  "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천강의 물위에 어려 있고

                산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길이 통했네 "


 선승(禪僧)이자 다승(茶僧)인 경봉스님이 설법을 마치고 읊조리곤 했던 차시(茶詩)이다.

 조주선사의 화두인  "차나 한잔 들게나"가  아름다운 시구로 다가선다.

 아침에 실상사에서 받아든 마조의 "이뭣꼬?"를 무겁게 들고 왔더니만

 손자뻘인 조주가 "차나 한잔 들게나" 고 답한 것이다.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깨달음의 길이라더니

 몽매한 중생이 알아듣기는 너무도 어렵다. 

        

  차한잔 따뜻하게 내 주는 스님도 없는 도솔암.

  예전 시끄럽다고 호통치던 서릿발 휘날리던 그 스님은 어디가셨을까!

  소 여물통 같이 긴 통나무 물받이에서 옥수 한 잔 시원하게 마시며 살그머니 도솔암을 나선다.

 

 하봉안부에서 중봉, 천왕봉, 촛대봉,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까지......

 지리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로 어른거린다는 도솔암 조망은 다음을 기약한다!

 

 아주 담백한 소롯문 쌉작문이 허허로이 지나는 나그네에게 문을 열어 준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그리고 우린 저승에서 이승으로?

 

 계곡물을 따라 지나는 도솔암 오솔길을 따라 참으로 착하디 착한 산꾼들의 대열이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다음에 다시 찾겠다는 인사를 묵언으로 남기고......

 

 

 <하한거 도솔암의 적막>

 

 <중생이 싸립문을 나서며..>

 

 <영겁의 와운과 암자를 들르고 지리를 나서는 그들..왜 조용하지?>

 

 <삼정 마을 입구 계곡의 천연 알탕-무릇 상당수의 선녀와 나무꾼들이 거시기를 내놓고 *탕을 했다고 함. 아울러 몇 몇 선녀는 날개 달린 의상을 잃었다나..믿거나 말거나..그래도 그들은 아직 잘 살고 있다고 전함>

 

  

 

 < 마음을 비우고..또 세상을 찾아 우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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